코멘트
도   강

도 강

2 years ago

5.0


content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영화 ・ 1968

평균 3.7

스트로브-위예가 9년 남짓되는 장고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서라도 이 작품으로 장편 데뷔를 해야했던 까닭에 주목한다. 어찌하여 음악이었고, 바흐였으며 그의 생애를 구송하는 화자는 안나 막달레나였을까. 이는 본인들이 믿는 영화론의 지평을 열기 위한 가장 탁월한 소재이자 장치로써 훗날 스트로브-위예 필름의 코어로 작동할 수 있다는 커닿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단순히 바흐만을 위한 헌사는 아님을. 스트로브-위예의 영화론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작품이라고 여기며. 플루서나 바그너의 철학을 굳이 빗대지는 않을 것이다. 비전문가 대중이 음악을 청취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장르에 따라 상이한 경향이 있지만, 다른 예술과 달리 대부분은 음악을 결과론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작곡가가 어떠한 고로를 통해 음악이라는 결과물을 창작했는가에 대한 인지의 부재. 그것은 그들의 생활을 관음하지 않고서야 작품에 투자한 시간과 자본의 경중을 쉬이 따져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스트로브-위예가 위 작품을 만들고자 했을 때 부딪혔던 가장 큰 곤경은 투자의 영역이었다. 당시의 필름 기술로는 온전히 10분 이상의 라이브를 동시 녹음을 통해 녹여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로브-위예는 바흐의 곡에 대한 애정과 동시 녹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훗날, 단 80개의 숏과 간결한 구성을 통해 바흐의 생을 톺아본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영화 자체는 바흐의 생을 화자 안나 막달레나(외화면)의 목소리로 재현한 뒤 그의 곡이 연주되는 라이브 숏을 반복하는 단조롭다 못해 단촐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미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내는데, 마치 의 요한처럼 수난을 겪는 바흐와 달리, 뒤에 이어지는 라이브 숏은 무색할 만큼 완전한 형태로 현시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관람자는 앞서 언급한 음악 청취의 태도를 그대로 적용시키고, 작품에서 서술되는 바흐의 수난을 배제한 채 음악의 완결성만 중시하게 되고 만다. 스트로브-위예의 필름들은 어떠한가. 그들의 영화를 단지 원전의 텍스트나 어떤 도시의 풍경을 훔쳐 그대로 복사한 것과 다름 없게 느끼는 이가 있지 않을까. 플루서가 말한 <음악 청취의 제스처>가 필요할 때이다. 스트로브-위예 필름의 작동 방식을 생각해보자. 스트로브-위예 대부분의 영화는 원전의 텍스트를 기준점으로 활용하여, 영화라는 개체를 통해 모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작곡에서 두 개 이상의 선율이 각각 음표 대 음표(punctus contra punctum)로써 모방하고 작동하여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러한 대위법적 모방의 한 기법인 “푸가”로 대표되는 작곡가가 바로 바흐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흐-안나 막달레나의 관계와 스트로브-위예의 관계. 나아가 원전-영화, 풍경-카메라의 관계성까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푸가처럼 쫓고(fugare), 쫓기는(fugere) 것과 같은 그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방/대조성이 자아내는 앙상블. 스트로브-위예는 바로 그러한 지점을 시네마적으로 포착했다. 훗날, 원전의 텍스트를 쫓는 영화와 풍경을 쫓는 카메라를 통해 본인들의 유물론적 관점을 시사할 수 있음은 물론, 본인들과 바흐-안나 막달레나처럼 동지적 결합이 얼마나 영화사에 커다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극 중 바흐는 “통주저음”에 대해 언급한다. 왼손의 멜로디를 쫓아 오른손의 화음 혹은 불협화음이 나타내는 조화는 신을 향한 찬미라고. 스트로브-위예는 본인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시네마적 푸가를 영화에 대한 찬미로 여기지 않았을까. 결국 오늘날, 스트로브-위예의 필모그래피가 완결되면서 로 치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