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JE

JE

8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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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자

영화 ・ 1956

평균 3.7

정치적인 수정보단 균열의 텍스트. 무엇보다 "존 웨인"을 통한 장르적인 균열. (※ 스포 및 긴글 주의) #1. 영웅의 균열 <수색자>는 무엇보다 이든, 즉 존 웨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영화사, 특히 웨스턴 역사에서 존 웨인이 차지하는 위상은 남다르다. 그는 (존 포드와 더불어) 웨스턴의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말 그대로 미국적 (백인) 영웅의 표상이며, 특히 존 포드의 <기병대 3부작>은 그를 이상적인 영웅으로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색자>에선 어떠한가. <수색자>는 존 포드가 (존 웨인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리오 그란데> 이후 6년 만의 웨스턴이다. 포드의 야심찬 복귀작으로 웨인을 택한 셈이다. 이에 본작의 풍부한 텍스트 속에서 존 웨인의 이든이 차지한 위치는 아무래도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이든은 지독하다. 애초에 인종차별적이지만, 데비를 찾는 여정 속에서 더욱 악독해지고 신경증적으로 발전한다. 그의 '수색'은 집요하며, 비밀에 부쳐진 과거만큼이나 은밀하고 폭력적이다. 이전의 서부 영웅과 달리 명료한 법이 없다. 특히 기병대가 인디언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이든은 상대의 두피를 벗기려는 등 가히 비이성적이다. 심지어 일전엔 데비가 인디언의 가족이 되었단 이유로 그녀를 죽이려 들었다. 이처럼 인디언에 대한 그의 인식은 강박적이며 지나치게 맹목적이다. 데비를 찾겠단 명목이었으나 그의 관념은 비뚤어져 있다. 영화는 그 비뚤어진 관념을 깊게 드러낸다. 이것이 전통적인 웨스턴 장르와 일부 백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실제적인 인종차별의 결과인지, 오히려 이를 비판하려는 포드의 의도인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갈린다. <수색자>를 수정주의의 시초로 보는 이들은 후자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일 테다. 나 역시 후자에 가깝다. 다만,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수정주의라는 견해는 잠시 유보하려 한다. 그저 이든으로 나타나는 극심한 인종차별적인 캐릭터가 포드의 비판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든의 노골적이고 저열한 시선은 지나치게 도드라진다. 영웅이었던 웨인이 차별적 결함으로 가득하다. 관객이 이 같은 이질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으며, 애당초 이든은 불투명하게 상정되며 관객과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또한 이게 감독의 의도가 배제된 것이라 하기엔 그의 앞선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포드는 이미 <아파치의 요새>에서 ‘인디언의 기병대 학살’이라는 실화를 (인디언을 악으로, 백인을 선으로 보는) 전통적인 선악 구도를 탈피한 채로 다룬 바 있다. 여기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인디언을 불행하게 하는 양심 없는 미국인이다.”(김보년, 2010) 또한 <황색 리본을 한 여자>에서는, 비록 기병대의 활약이 강조되긴 하나, 인디언을 학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평화와 공존의 상대로 우선 간주했다. 다시 <수색자>로 돌아와서, 강을 건너며 인디언과 대적하는 장면. 이든의 일행은 인디언을 조준하고 총을 쏘지만, 여기엔 그들의 시점 숏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총을 쏘고 있는 이든'만을 옆에서 비추며, 인디언으로 향한 그의 시점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총에 맞는 역숏에서조차 카메라는 측면으로 물러나 있다(인디언이 총을 쏘는 방향을 보면, 카메라의 위치가 이든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든의 총부리는 카메라, 그러니까 관객을 향한 것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특히 후반부의 마지막 전투 씬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병대를 땅 위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공격하는 기병대가 아니라 공격을 당하는 인디언에게 더 가까이 붙어 있는 시선. 즉 영화는, 액션의 활력은 잃지 않으면서도, 이들의 싸움에 관객을 동화시키지 않는다. 요컨대 굳이 포드의 개인적인 성향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를 통해 이미 백인과 인디언, 미국 개척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가 알고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색자>에선 혐오적인 발언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포드의 성향이 갑자기 바뀐 게 아니라면, 필시 의도적인 구성인 것이다. 또한 엔딩 숏을 주목해볼만 하다. 비록 데비와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그녀를 가족의 품에 안기는 이든이지만, 그들과 겉돌며 황야에 남는다. 넓은 황야, 그러나 고립적인 프레임. 그토록 어둡고 쓸쓸한 뒷모습은 더 이상 웨인에게 공동체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듯 단호하다. 만일 공시적인 접근이 허용된다면, 이런 웨인의 변화는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예컨대 후일 심리적 웨스턴이라고 분류되었듯 그간 백인 영웅을 상징해오던 이가 신경증적이고 비이성적인 차별 관념을 드러낸다. (어쩌면 <붉은 강>의 던슨에 영향 받았을) <수색자>의 이든은 올곧고 완벽한 줄 알았던 서부 영웅에 대한 명백한 균열이며, 곧 장르적인 균열이다. #2. 인간의 균열 그러나 <수색자>가 묘사하는 인디언을 보자면, 이 같은 ‘읽기’를 곤란하게 만든다. 태그 갤러거의 지적처럼 “인디언이 악당으로서 훨씬 잔인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납치와 살해, 인디언은 거의 악마적인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단순히 백인 영웅에 대한 균열로 영화를 옹호하기엔 저열한 시선이 가득한 것이다. 다만, 이든이 의도된 캐릭터라면 이 역시 의도된 시선이 아닐까? 갤러거는 “<수색자>는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정신병적인 반응 혹은 극단적인 차별을 묘사”하는 영화라고 덧붙인다. 즉 <수색자>는 전쟁에서 돌아온 이든(백인)의 비뚤어진 인식과 오도된 감정을 따라가고 부각하는 심리적인 서사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든을, 심지어 영화를 불편하게 볼 것을 요구한다. 영화의 태도가 모호하고 불편한 건 그럴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로저 애버트는 당시 웨스턴이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보는 판에 박힌 시각을 내버리면서 허약해졌다”고 지적한다. “웨스턴 관객은 윤리적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에 <수색자>의 ‘불편한 경험’은 계몽된 시각을 기피하는 관객을 향한 직설이 된다. 그렇다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 “선한 백인과 악한 인디언”이라는 전통적인 구도를 수정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전복적 혹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악한 백인과 선한 인디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백인은 가해자의 위치에 서며, 인디언은 피해자가 된다. 미국의 개척사를 생각한다면 이것이 응당한 시선일 테다. 그러나 허문영이 지적하듯 장르의 진화를 말하는 건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수정’을 논하는 건 영화가 지닌 예술적 생명력을 후퇴시키는 또 다른 실수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허문영은 아예 <수색자>를 수정주의의 시초라는 점에 의구심을 표할뿐더러, 웨스턴을 신화론적으로 읽는 것 자체에 맹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럼 개척신화로서의 웨스턴을 떠나서 <수색자>에 접근해보자. 이는 정치적으로 위험하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물론 전체 역사 속에서 인디언은 피해자였다. 그렇다고 모든 인디언이 매순간 선의의 피해자였다고 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간의 행위와 본성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건 오히려 정치적으로 부당하다. 모든 인간은 피해자인 동시에 일정 부분 가해자이며, 선한 동시에 악하다. 피해와 가해의 역학이 선악의 역학과 함께 가진 않는다. <수색자>는 이를 파고든다.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을 뒤집기보다는, 모호하고 이율배반적인 시선으로 가해와 피해를 끊임없이 전복하고자 한다. 인디언의 가해(납치와 살해)는 이미 (영화가 다루는 시간이 앞서) 백인의 공격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다시 이든은 기병대와 힘을 합쳐 인디언에게 복수한다. 요컨대 복수의 연쇄 속에서 인디언은 이제 일방적인 학살의 대상이 아니며, 그렇다고 막연한 화해의 대상도 아니다. 영화는 인디언을 (그동안의 백인처럼) 선악이 뒤섞인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며, 그 존재적 위상을 끌어올린다. 말하자면, 인식적 대상에서부터 도덕적 타자로 격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고전적인) 백인 영웅을 종결하고 관객에게 인종차별의 불편함을 환기한다. 그러나, 백인과 인디언의 문제를 떠나, 무엇보다 인간의 내면으로 우리를 잡아끈다. 광활한 자연과 모뉴먼트 밸리의 스펙터클이 컬러로 더욱 부각되는 가운데, 가장 긴밀한, 마음의 어두운 틈새를 비집는 것이다. 예컨대 후반부, 인디언과의 전투를 마치고 다친 이든을 위해 마틴이 물을 떠오는 장면. 장엄한 암석 사이의 ㅡ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자궁 같은ㅡ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마틴의 이미지. 즉 <수색자>는 정치적인 수정에 앞서 인간적인 균열을 다룬다. 어쩌면 <수색자>의 수색은, 그 너른 지평을 헤집는 인간적인 균열에 대한 끝없는 수색인지도 모른다. #3. <수색자>의 가치 개인적으론 <수색자>의 정치적인 결함이 그리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지 인디언의 문제에 국한하여 본작을 보는 건 지나치게 축소 관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떠나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특히 존 포드의 영화는 대개 비균질적인 장르와 잉여적인 숏으로 더 다채로워지곤 한다. <수색자>에서도 어김없다. 예컨대 물물교환 장면. 이는 중심 내러티브에서 한 발 물러난, 이를테면 잉여적인 씬이다. 그러나 상호 동등한 가치로부터 나오는 물물교환은 마치 인디언과 비-인디언의 관계를 표상하는 듯 하다. 둘(물론 마틴은 혼혈이다)의 (존재론적) 가치는 동등하지만, (물물교환의 오해처럼) 소통, 즉 인식론적인 오해가 발생하곤 한다. 차별이란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상황이 빚어내는 웃음과 내적인 리듬감은 충만한 가운데, 아내가 된 인디언을 대하는 마틴의 태도는 여전히 불편함을 이끌어낸다. 나아가 로리가 분개하는 건 '결혼'이라는 사건이지 '인디언 부인'이라는 상대 때문이 아니다. 다시 정치적인 문제로 돌아와 논지를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이런 기능적인 잉여가 (내러티브로 수렴되지 않은 채) 스스로 함축하는 영화의 활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든을 비롯한 스카, 마틴, 로리, 마사 등 다양한 인물의 감정선도 마찬가지다.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서브플롯이 끼어들고, 어떨 땐 심지어 뮤지컬 같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한편 (그 기능적인 역할을 차치하고서)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활력을 더하고 빛을 낸다. 영화는 아름답고도 힘찬 숏으로 가득하다. 특히 화면을 가득 채우는 풍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아름답거나 장엄한 피사체에 그치지 않는다. 인물의 후경엔 언제나 광활한 자연이 함께 걸리고, 때론 익스트림 롱숏으로 말 그대로 대지 앞에서 점이 된 인간을 비춘다. 이든의 병적인 집착을 더 볼품 없이 만들 뿐만 아니라, 마치 숭고와 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그 자체로 위약한 주체를 응시하는 거대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이처럼 그야말로 웨스턴의, 나아가 영화적인 스펙터클로 가득하다. 물론 정치와 윤리는 중요하다.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야 영화가 어쩔 수 없이 부족하고 안일해 보인다. 훨씬 계몽된 시각에서 경험하는 영화의 불편함은 관객을 향한 일갈이 되기보단 그저 저열함 자체로 남고 만다. 또한 윤리를 논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오히려 윤리적인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게 사실이다. <수색자> 역시 차별을 재현하려다 도리어 차별적인 영화에 머물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윤리적인 이유에서든, 장르적인 이유에서든 <수색자>를 수정주의라 하기엔 껄끄러운 지점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수색자>의 가치는 정치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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