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IDA

IDA

8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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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마

영화 ・ 2015

평균 3.9

좋지 않은 날이라 좋았다.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유일한 가족이자 유일한 연인의 죽음은 엘의 삶에 길을 잃게 만든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웃고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 손목, 맥박 위에 바이올렛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짧은 연애마저 끝나 다시 혼자가 된 엘을 집 밖으로 꺼낸 것은 손녀 세이지였다. 물론 그리 유쾌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세이지는 임신 중단을 원하고 당장 엘에겐 돈이 없으므로, 함께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삶을 되짚어 보듯이 낡은 차를 탄다. 어린 손녀의 선택을 위해 기꺼이 은둔을 끝낸다. 참혹하고 불쾌한 하루였다. 돈은 없고, 아꼈던 책은 헐값이고, 갓 헤어진 연인을 마주치고, 수십 년 전에 도망쳐 나온 전 남편을 만나게 되며, 손녀의 전 남친은 그게 내 애 맞냐는 식이다. 단언컨대 최악의 하루였다. 그럼에도 엘은 하루가 저물고 비로소 혼자가 됐을 때,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린다. 좋지 않은 날이었지만 많은 것을 마주본 날이었고 좋지 않아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날이었으며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이제야 엘은 혼자서도 웃을 수 있게 됐다. 보내줄 걸 보내야 간직할 수도, 추억할 수도, 살아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무엇이 됐든 원하는 걸 하면 된다. 바깥엔 증오와 편협함이 전부가 아닌 더 큰 세상이 있으므로. 화를 낼 땐 기꺼이 화를 내고 하루의 끝에서 소리 내 웃으면 된다. 엘의 집엔 주디의 사진이, 주디의 사무실엔 세이지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토록 서툰 유대의 온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