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그저 홀로 나아갈 것인가, 함께 나아갈 것인가만 다를 뿐이지, 우리 인생에서 끝나지도 않을 허공에의 질주는 이토록 불안하고, 무력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나에게 완전하지 않은 이 세상과 불안정한 나, 이렇게 서로를 채워주기에 이는 우리의 인생에 너무나도 걸맞는 질주임에 틀림없다.” 대니는 야구를 하면서 헛스윙을 남발한다. 내가 본 지금 이 장면만으로 대니가 야구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카메라가 조명한 대니의 야구 실력은 명백한 허공을 가르는, 혹은 허공으로 향하는 힘찬 헛스윙이다. 친구는 대니에게 묻는다. 싫으면서도 왜 하냐고. 헛스윙을 하고도, 2게임을 더 뛸 수 있음에도 싫어함에도 대니는 친구에게 말한다. “야구는 내 인생이야.” 늘 초조한 우리에게. 싫다면서 왜 자꾸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내 인생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니까라고 답하려 한다. 설령 나는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당신의 아들일 뿐이라는 이유로 이름과 머리색까지 바꿔가며 도망쳐 살아오는 것이 억울하고 싫다고 한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인생이라는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찍히는 낙인과도 같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무언가가 있는데, 이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산다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대니가 새로운 학교에서 듣는 첫 수업은 음악수업이다. 그 수업에서는 마돈나와 베토벤의 차이점은 베토벤의 음악에는 일정한 박자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린 베토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어렵다. 내겐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있던 학생들은 마돈나 음악이 나오자 한두명 나와서 춤을 추다니. 시키지도 않은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면, 우리가 우리 인생에 바라는 음악은 마돈나 음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슬프게도 일정한 박자가 없기에, 그 예측할 수 없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건 어려울 수 밖에. 때문에 영화 속 가족 모두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이 이리 깊게도 마음속에 파고드는 이유다. 이제는 익숙하다 싶을 때, 예상치도 못한 순간마다 도망쳐야 하고, 때로는 누군가 나에게 찾아와 미세한 균열과 변화를 안겨주는 것처럼, 일정한 박자가 없음에도 우리는 춤을 춘다. 서로를 껴안는다. 힘겨운 시간을 매 순간 함께 이겨내줘서, 있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이 영화가 감히 인생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와 인생은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영화의 위대한 시작이 다가오는 열차를 담아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한 장면이기에, 영화는 인생과 같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겠다.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담아놓은 하나의 매체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없었던,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영화의 힘을 빌려서 이뤄내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담아낸 또 하나의 수단임에 틀림없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할 때, 그리고 이 정의는 내가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수많은 경험들을 모두 다 아우를 수 없는 정의라면, 그 건방지게 함부로 인생에 대해 내렸던 나의 정의는 실패한 정의다. 우리는 인생에 경험한 수많은 카테고리를 나눈 다음에 그 카테고리 안에서도 하나를 선택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그제서야 그 미세한 부분에 대해 하나의 의견을 내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만든 매체는 영화다. 특히나 영화는, 우리에게 답을 말해주는 매체라기 보다 아직은 우리 인생에 대해 서로가 미문지사 한 같은 인간끼리 펼쳐놓은 하나의 생각의 터와 같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벽한 영화는 없을 거라고 당연한 말을 가당치도 않게 말해본다. 어떻게 우리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그저 한 부분만을 조명한다 한들, 저마다 받아들이는 사상은 다르기에, 여전히 인생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인간이 만든 영화는 이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작품을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 때문에 만일 영화가 이 세상 모두를, 아니 적어도 나에게 완벽할 영화를 만드는 일도, 인생의 정의를 찾는 것과 같은 허무한 허공에의 질주 같다. 하지만, 불완전한 영화에 불안정한 관객이 만나 서로를 채워준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 영화는 완벽하진 않지만, 완전한 영화가 된다. 특히나 분명 인생을 담은 영화는 영화를 관통할 하나의 정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완전을 위한 여지를 남겨준 공허한 공간들이 많이 있으므로, 나는 이 영화를 나를 위해 완전한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끝내 자전거를 내리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허공에의 질주를 다 함께 가 아닌, 홀로 나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홀로 나아가야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춤을 출 수도 없을 만큼 힘들지만, 너무도 완벽한 세상을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은 고로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며 독립하는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응원이 되어줄 수 있다. 그저 홀로 나아갈 것인가, 함께 나아갈 것인가만 다를 뿐이지, 우리 인생에서 끝나지도 않을 허공에의 질주는 이토록 불안하고, 무력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나에게 완전하지 않은 이 세상과 불안정한 나, 이렇게 서로를 채워주기에 이는 우리의 인생에게 너무나도 걸맞는 질주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번, 영화가 이 세상 모두를, 아니 적어도 나에게 완벽할 영화를 만드는 일도, 인생의 정의를 찾는 것처럼 같은 허무한 허공에의 질주 과도 같다는 말. 그리고 허공에의 질주는 나에게 완전하지 않은 이 세상과 불안정한 나, 이렇게 서로를 채워주기에 이는 우리의 인생에게 너무나도 걸맞는 질주임에 틀림없다는 말. 우리 모두에게 완벽을 위한 공허한 공간들이 많이 있으므로, 나는 이 영화를 적어도 나를 위해 완전한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말까지. 따라서 이 영화 “허공에의 질주”는 완벽하지도 안정적이지도 못한 나에게 가장 완전한 영화라는 문장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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