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마

남아 있는 나날
평균 3.9
-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다면, 아이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집사로서의 품위를 좇다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사리분별을 놓쳐버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 스티븐스에게서 아이히만이 계속 겹쳐보였는데, 역시나 해설에서 위와 같이 언급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책을 다 읽고나선, 이 '일류집사'의 자긍심을 뜯어 먹고 사는 스티븐스가 가엽게 여겨진다. 젊음을 쏟아붓고, 온 열성을 다하고, 인간적인 본능을 억제하고 이성으로 다잡으면서 성실히 일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걸까. 노인 스티븐스는 과거를 더듬어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애써 '자긍심'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은 주인을 믿고 따랐을 뿐임을 강조한다. 무서울정도로 맹목적인 신념,은 이렇듯 본인의 삶도 망가뜨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허물어뜨리는 거다. 결국 곁엔 아무도 없이 저택의 옵션처럼 딸린 신세가 된 그는, 또 다시 집사의 새로운 덕목인 '유머'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은 다른 게, 이 '유머'가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느낀 계기가 사람들을 통해서라는 거다. 드디어 스티븐스가, 자신과 주인의 관계에만 시선을 두는 게 아니라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한 거다.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으로 이 공동체와 모임들이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스티븐스. 긴 여행으로 시야가 트인 후 처음 갖게 된 '능동적 생각'이다. 노인이 다 돼서야 사람들을 둘러보게 된 그,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품위를 그가 살아있을 때 다 깨우칠 수 있을까. 더 넓은 시야와 그에 따라 확장된 생각으로, 그의 현재와 과거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의 끝은 아이히만과는 완벽히 달라질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