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 스포주의) <어느 가족>은 시스템의 밖에서 출발한다. 물건을 훔치고, 유괴 아닌 유괴를 하고, 혈연 아닌 가족을 이룬다. 하지만 그 공간엔 웃음이 있고, 비좁은 집을 덮어내는 충만한 활력이 있다. 일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도 유머러스한 농담이 있고, 성을 팔아도 웃음이 있다. 절도는 마치 하나의 놀이와 같다. 비록 아빠라 부르진 못해도 함께하는 것이 즐겁고, 새로운 가족 유리는 지금이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유대나 정"이라든지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이들의 대사처럼 영화는 아무도 관심 없는, 시스템의 바깥을 거니는 이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온기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미화나 낭만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들 무렵, 흐름이 완전히 뒤바뀐다. 영화가 절반쯤 지난 지점. "여동생에겐 시키지 말라"는, 쇼타를 향한 문방구 주인의 말. 모든 게 흔들리는 순간이다. 그간 알고도 모른 척 해준 문방구 주인처럼 이들의 낭만은 짐짓 거짓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영화는 서서히 다른 풍경을 비춘다. 예컨대 해고 당하는 노부요. 출근 카드를 찍어준 대가로 음료수를 건네주던 동료였지만, 이젠 위협으로 돌아선다. 앞서 음료수를 마시며 잡담을 나눌 땐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하던 것과는 달리 지금 두 사람은 각각 서로 다른 숏에 놓인다. 말하자면 완벽한 절연. 또한 하츠에와 아키 사이의 서늘한 비밀과 아키의 눈물마저 이어진다. 이제 이곳엔 더 이상 유대의 온기로도 어쩌지 못하는 냉기가 있고, 도덕의 균열에서 오는 비릿함이 있다. 게다가 하츠에의 죽음, 또 무엇보다 시스템 밖의 즉물에 망설이기 시작하는 쇼타가 있다. 점차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게 무엇인진 몰라도) 이들을 이어내는 건 위태롭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들에겐 아직 정이 있어, 최소한 그렇다고 믿게 되는 따스한 순간이 있어 관객으로선 차마 미워할 수도 연민이나 응원을 보낼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에 한 번 더, 마침(이라는 표현은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명백히 의도된 사건이다) 쇼타가 브레이크를 건다. 이때 그의 다리가 부러진다. 여태 그를 지탱해온 것. 시스템 밖에 놓인 유사 아버지의 사회적 한계를 역력히 들췄던 것. 그러나 이번엔, 시바타 때와 달리, 농담 따위의 웃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취조실의 공기는 급격히 딱딱해지고 이전과 달리 건조한 클로즈업이 화면을 메우기 시작한다. 마치 <원더풀 라이프>의 장면들처럼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경청하나, 그때와 달리 비의가 깊게 흐르고 쓴맛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늘 함께 프레임에 담기던 이들이 각자 따로 외롭게 자리한다. 해고 당하던 노부요가 맞이했던 '끊어짐'의 순간이 모두에게로 옮겨 붙는다. 수사관(혹은 영화, 혹은 감독)은 서로를 이어내던 것을 조각내려 애쓴다. 이제 전반부를 채웠던 활력은 사라지고 온기 대신 냉기가 가득하다. 사실 영화가 기다린 건 바로 이 순간일 테다. 영화의 구성을 3부로 나눌 수 있다면, 마지막 이 세 번째 챕터가 진정 영화가 기다린 바처럼 보인다. 지탱되지 않는, 아니면 결코 지탱될 수 없는 관계가 폭로되는 순간. 어찌 됐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를 비추고, 또 사회의 한계를 들쑤신다. 영화는 이들에게 낭만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전반부(1부)의 활력은 후반부를 위해, 후반부(2부)의 위태로움은 취조실의 망연한 균열(3부)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균열 이후 영화는 엔딩으로 그냥 흘러 가기 바쁘다. 모두를 끊어낸 영화는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씁쓸한 의문이 든다. <어느 가족>은 이들의 명암을 '함께' 담고자 했던 게 맞을까. 혹시 어둠을 보이고자 빛을 도구화했던 건 아닐까. 이들은 끝내 부서지고 만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부서지기 위해서 존재했던 건 아닐까. (이 모진 풍경에, 개인적으론, 박석영 감독의 <재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회를 말하라는 책임이 지워진 캐릭터들. 그들이 내뿜던 활기가 진정 그들 삶 자체를 위하던 게 맞을까. 단지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치 무너뜨리기 위해 쌓은 모래성처럼, 후반부의 균열이 줄 효과를 염두하며, 전반부를 더없을 생기로 채웠을 감독의 선택을 생각하면 원망스런 마음마저 든다. 특히 키키 키린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독 쇼타와 린에게 지워진 무게가 야속하기만 하다. 물론 그게 현실일 테다. 말하자면 환상으로 도피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냉철한 삶의 진실이다.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 가족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흩어진 가족은 이제 각자 알아서 버텨야 한다. 눈사람은 녹고, 버스는 떠난다. 오늘의 사회에서 함께라는 가치는 단지 찰나의 이상이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은 아직 이들의 정을 믿고 있지 않던가. 영화 역시 조각나버린 순간에도 "아빠"를 읊조리는 쇼타와 린의 표정을 엔딩으로 삼지 않던가. 영화는 균열 너머에서 서로를 '이어내는' 어떤 걸 믿고 있는 걸까. 그러기엔 가족의 흉터가 짙고, 이 씁쓸함과 아득함을 그저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공고히 쌓아올린 활력적인 전반이 있기에 점차 냉소적으로 변한 시선과 처연한 결말이 더 야속하다. 필시 감독의 통제 속에서 교묘하게 구분지은 그 간극. 공기의 의도적인 전환 내지 분절을 잔인하다 해야 할지 작위적이라 해야 할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온전히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차라리 관객을 위해 마련된 그들의 일상이며, 단지 사회를 위해 조성된 사건이다. 다만 카메라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또 달리 방도가 있을까도 싶어 어김없이 설득되고야 만다. 더욱이, 비록 지나고서 야속할지언정, 영화의 불균질한 공기가 가져온 순간순간의 감흥들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다. 가히 감독 필모의 집대성이라 할 만큼 그 풍경이 다채롭고도 깊다. 허나, 그와 동시에 원망스럽게 따스한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의 필모 중 가장 잔인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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