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잊혀진 캔디맨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 니아 다코스타 감독의 <캔디맨>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전작인 92년작 <캔디맨>을 반드시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후속작으로서 전작의 이야기를 정확히 짚어내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92년작 <캔디맨>이 명백하게 인종차별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92년작이 클라이브 바커의 도시괴담에 대한 탐구에 인종 차별에 대한 은유를 접붙인 것은 인종 문제를 다루는 창의적인 방식이었다. 누군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도시괴담의 공포가 반대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현실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는 것이 도시괴담의 속성이라면, 빈민가의 흑인들에 대한 위험한 이미지는 도시괴담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흑인들의 범죄에 대한 이미지가 괴담처럼 소비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92년작 <캔디맨>의 흥미로운 점은 캔디맨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실존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영화는 다소 혼란스러운 연출로 헬렌이 캔디맨일수도 있다는 여지를 계속해서 남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연출상 내부인인 헬렌의 시점에서 캔디맨은 실존하고, 연출 바깥에 위치한 외부인에 시점에서 캔디맨은 헬렌이다. 그럼에도 헷갈리는 이유는 영화가 외부인의 시점을 계속해서 내부인인 관객들에게 끌어오고 있어서다. 헬렌이 캔디맨의 살인 현장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헬렌은 캔디맨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결국 빈민가라는 공간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일반화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 결국 92년작 <캔디맨>은 백인인 헬렌이 흑인들의 위치를 체험하게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던 필이 <캔디맨>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지점을 더 확장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공포 영화를 통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인종 문제에 대한 화두를 단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2021년작 <캔디맨>은 그러한 지점에서 성공했다고 느껴진다. 이번 <캔디맨>에서 가장 먼저 드러났던 변화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변한 카브리니 그린의 풍경이었다. 변한 도시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캔디맨 괴담은 구전되지 않고 있었다. 과거의 참혹했던 사건은 이제 없다는, 마치 더이상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지우려 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92년작에서 도시괴담의 공포는 이야기 하는 것으로 성립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더이상 도시괴담이 이야기 되지 않는 세상이 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이번 영화는 과감한 해석을 더했는데, 사람들이 외면했기 때문에 도시괴담은 다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 캔디맨이 누군가를 죽인, 빈민가에서 누군가 죽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인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다시 그런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마치 조지 플로이드 처럼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이야기거리가 생겨야만 잊지 않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캔디맨>의 메시지가 결국,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여기에 대한 영화의 대답은 예술가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유령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는 예술가의 영감과 본질적으로 같다. 어쩌면 유령이 예술 그 자체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하는 일은 그러한 유령을 포착해내는 것일 테고,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화가인 안소니가 캔디맨을 불러오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소니가 불러온 유령, 캔디맨은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의 역사다.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에서 죽는 캐릭터들은 오직 백인들 뿐이다. 흑인 캐릭터는 죽더라도 그 모습을 전시하지 않는다.(영화가 무섭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때문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이 죽을 것이라는 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죽은 백인 캐릭터들은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안소니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안소니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평론가는 젠트리피케이션만 되풀이해서 말하며 안소니의 작품에 관객이 해석할 여지가 없다고 한다.(이것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를 예상한 말일 수 있다.) 갑자기 영화의 서사와 아무 상관 없이 등장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채 안소니의 작품을 사진 찍는 학생은 마치 미술관을 소비하는 현재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학생 역시 뒤에 다시 등장해 캔디맨에게 살해당한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이 캐릭터들은 유령을 포착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이다. 인종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공포 영화 <벨벳 버즈소>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번 <캔디맨>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영화의 서사가 공포 영화보다는 히어로 영화 같았다는 것이었다. 영화 초반 안소니가 벌에게 쏘이고 난 후, 안소니의 신체가 점점 변화하고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건 누가봐도 히어로 영화의 그것이 아닌가. 무시무시한 캔디맨으로부터 도망쳐야 할 것 같았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사실 안소니를 캔디맨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다다른다. 과거에도 이미 또다른 캔디맨들이 있었고, 인종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에도 캔디맨을 불러와야만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이야기 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안소니를 캔디맨으로 만든 윌리엄이 악역인줄 알았지만, 마지막에 캔디맨을 부르는 브리아나의 모습을 보면 이 영화에 악역은 캐릭터로 구현하지 않은 것 같다.) 니아 다코스타 감독의 연출도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장면의 안과 밖,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사운드 디자인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려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종차별이라는 유령을 담아내고 있었다. 결국 공포 영화 라는 장르의 미학은 당대 사회의 유령을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지점에서 이번 <캔디맨>에 담긴 유령의 급진성은 뼈가 저리게 무서운 것이었다. (극 중 안소니의 작품 중 하나가 해당 역을 맡은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왓치맨>의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의도한 것일까.)
좋아요 65댓글 2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