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맹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평균 3.7
해체주의자같은 나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마르크스를 중심으로한 모더니스트 사이의 견고한 다리를 놓는 훌륭한 작업들. 주이상스와 잉여를 통한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인정하지만 주체의 해체까지는 바라지 않는 지젝. 주체와 본질을 해체하는 순간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지젝. 헤겔의 변증법을 라캉을 통해 뒤집은 차이의 논리도 좋았고 그렇기에 여전히 타자-분열-자아를 주체로 상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그 사이에 현실에 가장 맞닿아 있기에 이렇게 힙한 학자가 될 수 있었구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알지 못함'에서 '하는 일'로 뒤집는 것. 이데올로기는 실재가 아니라 행위 속에 있는 것. 알고 있지만 습관적 행동으로 자리 잡은 것. '비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인 듯이' 행동하는 것. 현상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좌파 지식인의 냉소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있는 이야기. 헤겔의 절대지는 개념적 총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념을 매 순간 풀어 놓는 근본적인 부정성의 이름이다. 상징계의 반대 부정성이 바로 실재계이기에 모순 어법이 가능한 곳. 증상은 보편적인 원칙들의 불완전한 실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를 구성하는 기능. 비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자체에 있다는 것도. 상품화도, 꿈의 내용이 아닌 재료도 아닌 꿈 작업의 형식을 분석하는 것. 자본주의 내에서는 장애나 모순으로 등장한 요소가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동력이 된다. 스스로를 극복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탈영토화과정. '잉여 주이상스'-잉여가치와 같은 형식.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로 인해 돌아가듯, 상징계에서 충족될 수 없는 잉여 주이상스가 실재계를 참고함으로써 상징계를 건전하게 만든다는 것. 차이로 되돌아감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 상징계의 균열이 상징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증환. 증상과 인간. 증상이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라는 것. 상징계에서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서 붙잡으려 해도 주이상스의 이름으로 빠져나가는 증상들. 주이상스의 물질화. 그 시니피앙과 주이상스의 결합들. 증환은 실재계의 구멍이다. 상징계로부터 제외된 현실에서 일종의 '괴물'로 나타나는 증상. 시니피앙은 기의와 함께 작동하는 소쉬르의 개념이 아니라, 상징계의 비어있는 자리 담론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을 가리킨다.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내용이 매번 달라지는 것. 일대일 매칭이 아님. 이런 텅빈 기표지만 주인 기표의 역할을 하는 이데올로기. 그렇기에 잘못 미끄러지면 텅빈 기표가 되는 것. 이데올로기가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벡터라는 것. 누빔점의 벡터를 추적하는 것에서 출발. 대상에 기표가 생기고 잉여가 생기는 그 순간을 포착. 이미 결여된 타자로서 태어난 I가 이데올로기로 인해 상징계뿐만이 아니라 상상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 이상적 자아(상상적 동일시)은 자아-이상(상징적 동일시-이데올로기의 원형)에 종속되어있다는 것. 분열은 당연한 것. 그렇기에 세 가지 병리적 현상. 정신병(슈퍼에고에의 동일시) / 신경증 (상징계에서 소외된 모든 정상인들 – 상상적 자아를 객관적 자아에게 맞추려는 하지만 이상적 자아가 침해당하면 화를 냄)과 강박증 (먼저 상징적 동일시에 어떻게든 맞추려는 앞장서서 실행하려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증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이 뒤바뀐 경우.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것, 자기를 지우고 타자를 세우는 것). 이상적 자아를 보는 것이 ‘시선’이라면, 장-이상을 통해 보는 것이 ‘응시’이다. 두 개를 분리해서 보자. 상징질서가 상상계에 미치지 않도록. Desire = Need-Demand -> 남는 찌꺼기인 욕망. 뭘 원하니에 대한 물음들. 잉여 주이상스 주위로 박동하는 욕동들.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를 가리키는 것. 대타자-상징적 질서조차 분리되어 있기에, 문제는 주체에게 있다는 것. 환상을 가로질러서 극복하는 것. 환상을 흔들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주이상스를 추구하게 하는 것. 대타자의 결여를 보는 것. 욕망의 대상이 그 자신의 공백과 결여라는 것. 증상의 배후의 힘은 이데올로기로 포섭되지 않은 잉여에 있다는 것. 상징적 죽음은 상징계 자체를 무화한다. 실재계, 죽음충동, 주이상스의 힘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하자는 것. 민주주의로서 시민으로서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불평등을 통해서 민주주의는 지탱되고 있다는 것. 상징계는 구조적이지만 실재계는 탈구조적이다. 대상이 없는 언어는 없다. 담론만 양성해낼 뿐인 포스트모더니즘. 행동뿐이다. 주체가 없기에 실천적 행위 주체도 설정하기 어렵다는 것. 미끄러지는 주체. 텅 비어있는 저자의 자리지만 매번 그 자리를 차지하는 주체들을 부정할 수는 없음. 곧 실체이기도 하다는 것.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담론 해체 작업들이 오히려 담론을 만든다는 것. 주체마저 버리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 실재계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속성과 효과를 만드는 실재의 효과. 그러므로 실체적으로 제시될 수 없음. 그 상징계가 균열되는 순간에만 나오는 그 주이상스와 찌꺼기들 그 실재계의 조각이 ‘숭고한 대상’ 계속 상징계의 균열을 내는 것들. 실재계에서의 선택은 주체가 만들어가기에. 무의식적이고 초시간적인 선택들. ‘구조’가 아니라 ‘행동’ 숭고한 대상이 허구라는 걸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이데올로기 간에 욕망의 정체를 읽어야한다는 것. 현실 자체가 재생산될 때 이데올로기적인 신비화가 항상 따르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 명제의 동일성을 깨는 방식들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부정성과 만난다. 동일성의 전복을 통한 차이의 변증법. 차이의 논리에 의해 전복된 동일성의 논리. 아무것도 없음을 체험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 ‘무의 경험’. 실체야말로 완벽하게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계를 가리킨다는 것. 환상 대상 a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nothing이 아니라 구조 내의 공백이라는 것. 이데올로기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속이는 것. 본질은 하나의 동일성이 아니라 여럿의 차이에 있다는 것. 현상이 곧 본질이다라는 것 .본질의 균열은 실체일뿐만이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 앎의 문제가 아니라 함의 문제라는 것. 현실이 허구라는 것보다 어느 부분이 허구인 것임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가상인 현실과 상징계는 실재계를 가상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뿐이다. 실재의 침입을 괴물이나 유령의 이름으로 부르지말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주자는 것. 탈이데올로기시대라는 것은 그것이 너무 일반화되어서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 조차 낯선 게 되었다는 것 . 폭압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여전히 이데올로기 속에 있는 것. 호모 사케르의 정치 철학. 이데올로기가 만든 주체를 폐기하고 타자의 비존재를 떠맡는 것. 상징화를 뒤흔들어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를 지속적으로 열어젖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