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태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평균 3.3
누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가 누구냐 물으면 손홍규 작가님이라 답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렸던 손홍규 작가님의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한국 작가의 단편집을 샀었다. 아마 <발라드의 기원>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당시에는 어떤 책을 읽어도 이게 왜 좋았는지 별로였는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문학 강의를 듣던 중 교수님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 듣곤, 마찬가지로 손홍규 작가님이랑 답했다가 여러모로 특이한 타과 학생 취급을 받았을 때도 왜 이 작가님의 소설이 ’특이 취향‘으로 분류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루한 소설‘. 사실 난 손홍규 작가님의 소설이 지루하지 않다. 지금도 상당히 재밌는 편이다. 하나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는 짐작이 간다. 이건 소설 외적인 경험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그래? 독특하네.‘ 일평했던 교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홍규 작가님을 강의실로 데려왔다. 덕분에 나는 손홍규 작가님의 ’쓰는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개중 작법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던 내가 작가님께 ’집필 스타일이 궁금하다‘고 물었는데 작가님은 ’그냥 앉아서 나오는 대로 쓴다‘는 식으로 답해 기뻤던 적이 있다. 실상 전혀 다른 말이었을지라도 나 역시 자신의 작법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결국은 소설의 문제이므로.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구성 때문이지 않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문장 뒤에 따라붙을 다음 문장이 풍길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는 전환되는 무언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심적 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흐름‘대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반면 손홍규 작가님의 그것은 그러한 흐름을 아주 손쉽게 망가뜨린다. 혹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다. 손홍규 작가님의 구성, 아니 문법은 그러하다. 한 문장 뒤에 같은 결처럼 보이는 문장이 있다. 하나 다시 살펴보면, 이후에 이어질 내용을 생각해 보니 크게 쓸모없을 듯한, 없어도 그만인 문장이다. 손홍규 작가님의 소설은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고 나타나고 나타나서 문단을 이루고 소설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작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의자에 앉아 ’나오는 대로‘ 소설을 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작업은 사전에 ’완성된 시안‘을 준비하고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나의 예상이지만, 손홍규 작가님은 강렬한 인상 혹은 일상 속 자유 연상에 의해 우연이 떠오른 심상 등의 단발적인 이미지, 음성과 사유를 계속해서 문장 아래로 밀어내는 식으로 글을 쓰실 것이다. 사실 내가 그렇다. 어쨌거나 이러한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다 막히고 헛도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건 전후로는 그것의 근거가 될 과거 회상이 있어야 하며 동인이 되는 인물, 배경 등이 밝혀져야 하는데. 여러 편 소설을 쓰다 보면 이러한 시시한 조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어련히 갖추어진다. 그러니 이것은 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의 간격 문제인 셈이다. 이 문장 뒤엔 이 문장, 저 문단 뒤엔 저 문단이 이어져야 하는데. 호흡이 너무 길거나, 짧지 않나 하는 중얼거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손홍규 작가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신선한 설정에 빠졌던 것이지만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그렇게 느꼈었다. 이 소설에서도 등장하는 프루스트처럼. 연상이 연상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이 기어이 삶의 종막까지 이어져 프루스트라는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려 한다. 하나 그것을 위한 노력과 과정마저 그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 그 일부이지 않나. 종결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들. 죽음, 사랑, 그리움과 회한. 콘크리트를 닮은, 배다른 삼촌이 끝내 가족을 떠나지 못한 이유란. 그의 형이 그에게 보여줬던 가족애,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완결되지 못한 채로 언제나 재생되고 있다. 삼촌의 돈을 갖고 몇 년간 잠적했던 숙희, 찾고 난 뒤로 더욱 큰 외로움을 안긴 사랑, 물에 잠긴 공장에서 노동자를 내보내다 감전사한 한 여성 운동가. 삼촌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프루스트처럼 지루한 소설’만을 읽고 있다. 그녀와 나눈 순간과 순간, 시간은 콘크리트처럼 삽시간에 그의 몸을 붙잡았다. 하나 그것은 아직 굳지 않았다. 소설에서 이미 밝혔던 것처럼 그는 ‘오래 산다 해도 백 년 이상은 못 살 테고, 죽는 순간 그때까지 겪었던 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일 마저 구십오 퍼센트 정도에 멈‘추고 말 것이다. 요즘 다시 읽기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소설은 몰라도 ‘이야기’란 결국 이런 형태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다. 구전으로 전승되는 설화처럼. 정말 그 이야기의 주인공 혹은 화자처럼 ‘말’해야 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만큼 연상을 덧붙이고, 오려 내다, 가끔은 다른 길로 새기도 하고, 그러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기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감상에 맞게, 화자의 ’말‘ 몇 마디를 그대로 인용하고 마무리할까 한다. “눈치 빠른 이라면 삼촌의 사연을 담은 문장들에 사실은 내 사연도 담겨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가까운 사람 가운데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분명히 알아볼 것이다. 삼촌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임을.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진정으로 위로가 되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왜 그 슬픔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가.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않더라도 한생을 살아갈 수 있는데. 거기야말로 삶의 한복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