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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평균 3.8
"삶이 가려울 때 시를 읽자." 내가 어느 날 블로그에 써 둔 말이다. 그러나 '삶이 가려울 때'가 언제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면 나는 그 즉시 알아챈다. 그것은 하나의 직감이자 느낌이니까. 언어가 필요한 느낌, 사람이 필요한 느낌, 고독이 필요한 느낌. 필요의 대상은 때에 따라 바뀐다. 그것을 내 뇌는 순간적으로 '삶이 가려울 때'로 언어화한 것이다. 느낌의 언어화다. 이런 매커니즘이 시에는 늘상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진술뿐인 시도 있고, 묘사뿐인 시도 있지만 좋은 시에는 대체로 진술과 묘사가 이 느낌의 언어화 과정을 경유해 마구 뒤섞여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경유의 과정을 독자로서 되짚어 추론하길 좋아한다. '이 문장은 이런 느낌에서 쓰였겠지•••.' 그런데 이 추론엔 정답이 없다. 오직 추론의 과정만 반복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언어세계가 무한대로 넓어진다. 나에게 내재돼 있지만 마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던 느낌들이 시인의 언어를 빌려 정확히 명명된다. 이것은 (적어도 내겐) 거의 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의 '시인의 말' 모음집인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은 완벽한 책이었다. 시인의 말도 독자가 그것을 시로 향유한다면 시니까. 무려 시집 맨 앞장에 배치되는 특별한. 책 속 송승환 시인은 "나는 있는다"라는 아주 짧은 진술로 '시인의 말'을 마친다. 반대로 박상수 시인은 진술 없이 이미지만을 나열한다. "가시엉겅퀴즙/(•••)/코코넛 파우더//샤라랑/샤라랑". 이 가운데 이현호 시인의 '시인의 말'이 있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그다음은 세계//그 하나 둘 세계를/네게". 이 문장엔 진술과 묘사, 리듬과 라임이 거의 다 있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라는 진술, "하나 둘" 수를 셀 때의 리듬, "세계를/네게"라고 말할 때의 라임, 그리고 그 모든 게 모여 하나의 '시인의 말'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선물처럼 당도하는 이미지. 그 이미지는 내게 '이 시집으로 네게 내 세계 전부를 주겠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는 건, '나'에게 '너'만을 위해 뛰는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는 말. 이렇게 로맨틱하게 해석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의 추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