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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겐

로트링겐

3 month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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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영화 ・ 1968

평균 3.7

페터 네슬러의 글: 다니엘과 장-마리를 위하여 2021 전문: https://lothringenseoul.com/peter-nestler-for-dani%C3%A9le-and-jean-marie -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만났다. 1958년, 장-마리와 다니엘은 파리를 떠나 처음에는 암스테르담으로, 다음에는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슈반탈러 거리의 중앙역 근처, 고층 건물 안 작은 방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가장 큰 영화 프로젝트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를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독일로 온 것이었다.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는 것을 거부한 장-마리가 투옥을 피하려는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다. (“알제리인은 내 친구들이다”라고 장-마리는 말했다.) 그의 고향인 메츠에서, 그는 일찍이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활동, 알제리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그 과정에서 프랑스 경찰은 그를 학대하기도 했었다. 1950년대 초, 장-마리는 스트라스부르, 낭시, 그리고 메츠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중요한 영화들로 구성된, 생기 넘치는 프로그램을 가진 필름 클럽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프랑스 동부에서 파리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니엘을 만났다. 이후로 몇 년 동안, 그는 아벨 강스, 장 르누아르, 자크 리베트,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촬영 현장에서 일하며 견문을 쌓았다. 그러던 중 알제리 혁명이 시작되었다. 해당 시기, 그는 이미 그의 바흐 영화를 위한 촬영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만프레트 블랑크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초상 영화, 〈시선의 끈기〉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마리: 저는 바흐에 대한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그게 195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영화 창작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저를 놀랍게 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 있어 즉시 브레송을 떠올렸습니다. [...] 이 프로젝트를 통해, 브레송이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 이뤘던 것을 그가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말은, 그 영화에서는 문학 텍스트가 있다면 이 영화에는 음악 텍스트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쟁이 말했듯, 문학 텍스트를 ‘원료로서 있는 그대로의 미학적 질료(matiére esthétique brute)’로 여기고, 영화를 위해 촬영하거나 각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누군가가 음악적 조직을 가지고 동일한 것을 시도하거나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 겨우 있었던 제가 그것을 그에게 설명했고, 그는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저 또한 많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약간 수줍어 했으며 저는 몹시 수줍어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며, 바로 당신입니다.” 그걸로 저는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저를 사로잡았던 또 다른 존재는 다니엘이었습니다. 우리는 1954년 리세 볼테르(Lycée Voltaire)라는 김나지움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브레송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을 때, 저는 그녀에게 저와 함께 각본을 쓰고 영화를 준비하고 싶은지 물어봤습니다. 물론 제가 처음 보자마자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약 제가 홀로 남았다면 아마 영화를 한 편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게을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아마도 실패했거나 포기했을 것입니다. 혹은… 장-마리와 다니엘이 독일에 왔을 때, 바흐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싸움은 수년간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서독과 동독에서 촬영이 가능한 장소와 바흐의 자필 악보를 물색했다. 그들은 이러한 장소뿐만 아니라, 바흐가 쓴 악보, 당대의 문서와 편지들에 대한 촬영 허가도 요청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은 오르간 연주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를 만났다. 당시 그는 암스테르담과 빈의 음악원에서 하프시코드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레온하르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역으로 출연시키고 카메라 앞에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레온하르트는 처음에 다소 조심스러워하며 영화가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장-마리와 다니엘은 설명했다. 결국에, 그는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형 프로젝트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 연대기〉를 위해 자료를 찾고 예산을 모으는 동안, ‘초조함 때문에’, 장-마리와 다니엘은 1962년에 그들의 첫 단편인 〈마쇼르카-머프〉를 만들었다. 1964/65년에는 하인리히 뵐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전보다 더 길어진 영화인 〈화해 불가 혹은 폭력만이 폭력이 지배하는 곳을 돕는다〉를 완성했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그들이 〈화해 불가〉의 계획을 위해 뮌헨의 촬영 후보지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은 이자르강 근처이자 영국식 정원 맞은편에 위치한 보겐하우젠 지역에 있던, 이전에 상류층이 살았던 대형 주택의 1층 응접실이었다. 나는 거기서 살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하녀가 지냈을 작은 방을 빌려 쓰고 있었다. 해당 주택은 친구들 소유였다. (그는 시인이었고, 그녀는 성악 지도자였다.) 친구들은 그들이 집을 살피는 동안 내가 그곳에 있어볼 것을 권했다. 나 또한 영화인이기 때문에, 이 프랑스 영화 감독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분명 흥미로울 것이라고 했다. 장-마리와 다니엘이 방문하여 이곳(방 가운데에 소파, 바로크 종교 조각상, 거대한 검은색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을 촬영지로 결정한 그날, 우리 셋은 소파에 앉아 다과를 즐기며 영화에 대해, 영화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요한 것은 집중과 정밀, 카메라 앞에서 발견하거나 구성한 것들에 대한 존중과 신중이라는 의견에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동의했다. [...] - 일환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