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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kong1922

mekong1922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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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

영화 ・ 1997

평균 3.9

거짓으로 규제된 일상 속 스며드는 진실이라는 물줄기. 그 물줄기는 언뜻 보면 단단해 보이는 얕은 거짓을 천천히 와해시키고 만다. 초반 장면이 보여주듯 마치 시체를 연기하며, 자신의 본능(사랑, 성 정체성)을 회피하는 거짓의 헤엄은 의미 없다고 말하고 싶다. 아마 그것은 자신을 위한다기보단 그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며 물의 수순에게 힘없이 범람당하고 말 것이다. 진정 ‘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샤오강은 호모인 자신을 속인다. 그를 기점으로 영화는 <엉클 분미>의 유인원이 된 아들, <라탈랑트>에서 그려진 얕은 사랑이 지닌 공포처럼 ‘원인 모를 고통’이라는 수순의 요소를 샤오강에게 부여한다. 안정적인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상적 이미지에서 유인원, 죽음, 공포, 두려움, 사랑 같은 원초적인 수순을 조립하듯 집어넣어 그의 원초적 본능을 강제로 일깨우는 것이다. <엉클 분미>의 젠과 통이 ‘나’를 속였을 때, 영혼과 육신이 두 갈래로 나눠지듯 <하류>에선 고통이 샤오강의 목을 감싸 안는다. 표면적으로 고통을 내던지려는 그의 의미 없는 도피는 샤오강이 갑작스레 가진 원인 모를 고통을 한층 더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 그렇다면 그의 고통을 진정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앞서 말했듯 본능을 도피하는 행위는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본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내연남이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척하는 아내,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는 게이지만 가정을 공유하는 남편. 모두 ‘안정’을 위해 말이다. 자신의 본질을 속이며 건설한 지붕은 가녀린 빗줄기에 처량히 무너진다. 또 그 빗줄기는 그의 성 정체성을 자식이라는 거울로 비출 때, 그의 눈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본질은, 물은 계속해서, 어느 곳에서나 흐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도피하고, 경시하든 말든.. 흐를 뿐이다.. 
영화 내내 감독은 소통이 결여되고, 가족 간의 소외와 함께 고독만을 즐기는 가족들을 비춘다. 그렇지만 영화 후반부 각자 숨기고 싶었던 본질의 경합 이후 서로 마주한 부자의 침대 시퀀스에서는 조금이나마 관계로서의 진전을 해 나가는 것 같다. 미약하지만 정말로 나아갈 수 있는 헤엄을 말이다. 그 헤엄을 기점으로 샤오강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추구하는 바와는 어긋난 그가 처음으로 창문을 열고, 어긋나게 세상을 마주해 본다. 고통을 여전히 지닌 채, 비틀어진 목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씩 천천히 걸어나간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수치스러움과 함께 비로소 나아가는 그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순응자>에서 마르첼로는 본인의 호모였던 어릴 적 기억을 죽이고, ‘다수’로서의 삶을 희구했다. 그리고 결국 무솔리니 정권의 몰락을 맛본 이후 <하류>에서 표현된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흐른다는 본질을 발견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발견했다. 사실 마르첼로는 그저 사회 밖 철창에 갇힌 호모였다. 그는 사회가 손가락질한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호모를 보곤 미소를 보였다. 분미 삼촌처럼 본인이 일군 삶이 유약하게 무너짐에도 그들은 미소를 보였다는 것이다. <하류>에서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본질들을 들켜버린 샤오강도 부끄러운 어긋난 고개를 당당히 내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마르첼로, 샤오강, 분미 삼촌은 모두 문서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추상의 본질을 향해 묵시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보이진 않지만 항상 흐르고 있는 본질의 물줄기, 잔향처럼 말이다. 그들이 기어코 내뿜은 질긴 잔향들은 하염없이 그들의 추상적인 기억들을 풀며 명확해지고 부끄러워질 것이다. 샤오강은 본인이 하류의 가정에 있는 것을 알았고, 하류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치스러움과 동시에 단단해진다. 그는 누구보다 값진 부끄러움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