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chan

chan

7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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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영화 ・ 2017

평균 3.5

-붕괴되어가는 유럽에 대한 다각도의 코멘트- . . (스포일러) <해피엔드>는 당혹스러운 감정에서 시작하여 다시금 당혹의 감정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시작과 말미에 우리에게 도달하는 두 번의 당혹감은 유사한 감정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극이 시작하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모바일의 프레임이다. 시점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른 채, 우리는 누군가가 중계하는 모바일 프레임의 시청자가 되며 시작부터 당혹스러운 감정이 견지된 채 극에 우겨넣어진다. 4개의 프롤로그 에피소드가 지나가고 마침내 본 오프닝이 시작되면 우리의 당혹감은 배가 된다. 모바일의 프레임에 이어 우리는 다시 한 번 매개체의 속성이 내포된 숏을 맞이한다. 본 오프닝의 첫 숏인 CCTV 중계화면은 이전의 프롤로그와 너무나도 생뚱맞은 맥락이라는 측면에서 당혹스럽고 프롤로그에 이어 또 다시 그 시점의 주인공이 괄호 쳐져 있다는 점에서 재차 당혹스럽다. 대략 5~6분에 거쳐 제시되는 프롤로그와 오프닝씬만을 단적으로 보았을 시, 우리가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단하나 뿐이다. 영화가 우리를 은근 슬쩍 영화 안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 상황을 중계하는 텍스트만 있을 뿐, 상황에 대한 리액션 텍스트는 부재하는 영화의 프롤로그와, 마치 현장에서 직접 CCTV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영화의 오프닝은 은연중에 스크린 안과 밖을 무화시키며 관객을 직접적으로 극에 동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프롤로그와 오프닝에 대한 약간의 첨언을 보태자면 이는 앞으로 이어질 영화의 진행방식에 대한 일종의 선언, 혹은 예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다보고 나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뭔지도 잘 모르겠는 사건을 먼저 제시하고 후에 사건에 대한 전말을 우리로 하여금 암시케 하는 영화의 모호한 화법은 그 자체로 오프닝의 연장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후에 프롤로그와 오프닝의 시점의 주인공이 각각 에브와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였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는 과정에서 모호함이 다분히 서려있다.) . 무슨 예기를 하려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오프닝을 지나, 우리가 처음 알아챌 수 있는 영화의 문제제기는 다름 아닌 세대론이다. 조르주(장 루이 트린티냥)와 안느(이자벨 위페르), 그리고 토마스(마티유 카소비츠), 피에르, 에브 등, 할아버지부터 손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대가 모여 있는 초반부의 식사자리는 본격적으로 세대간의 갈등과 균열의 조짐을 우리에게 환기하기 시작한다. 후에 좀 더 공개되는 정보들에 기반 하여 여기까지의 영화를 시점의 이동으로 한 번 재구성 해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이 프롤로그와 오프닝의 시점의 주인공은 각각 에브와 피에르이다. 영화에 본격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안느이지만 후에 밝혀지는 정보들이 사실 안느가 등장하기 이전에 영화는 에브와 피에르를 순차적으로 먼저 등장시켰다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셈이다. 안느가 시점의 주인공에 오기 전까지 에브와 피에르가 차례대로 시점의 주인공이었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에브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피에르는 어머니가 사장으로 재임 중인 회사의 작업물이 붕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죽음을 한 인간의 붕괴로서 바라본다면, 에브와 피에르는 본인들의 윗세대, 혹은 그들의 결과물이 무너지고 붕괴되어 가고 있는 그 현장을 영화의 시작에서 목도한 셈이다. 오프닝의 직후에 영화가 그 윗세대에 해당하는 안느를 곧바로 등장시켰던 것은 과연 우연일까? 시점의 바통이 안느에게 전달되자 영화는 재빠르게도 안느의 윗세대에 해당하는 조르주를 등장시키며 본격적으로 세대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대략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영화의 식사자리 중 그들의 첫 번째 식사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단서는 대충 두 가지 정도로 보여진다. 첫째. 안느와 피에르의 위태로운 관계. 둘째. 에브의 새 어머니가 하는 에브의 이복동생에 대한 의미심장한 대사. 이는 과연 무엇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까. . 알 듯 모를 듯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불안한 징조만 내내 암시하던 영화는 두 번째 식사자리에 이르러 마침내 비판의 잣대 하나를 형성한다. 새로이 합류한 에브에 대해 조르주는 영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기어코 다른 가족들 앞에서 에브에게 면박을 주고 만다. 후에 사과의 말과 환영의 인사를 덧붙이며 싸해진 상황을 무마해 보지만 극중 인물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조르주의 진심은 후에 덧붙인 말이 아닌 처음의 불편한 언사에 있음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위선이란 말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브에 대한 조르주의 위선을 세대론으로 바라봐도 좋을 테지만 가정 내에서 서로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의 관계로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가정의 실세와 다름없는 붙박이 조르주와, 이제 막 가정 내에 합류한 에브의 관계는 현재 프랑스 내에서 난민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는 도시인 칼레를 영화가 극중 공간으로 삼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 체제에 새롭게 합류한 에브에 대해 묘한 불쾌함을 표하는 조르주 개인의 표정은 극의 말미인 축하연에서, 피에르가 데려온 난민들을 바라보는 이들을 비추는 숏에서 다수의 불쾌함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다들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의를 갖춰 이들을 대접한다. 말하자면 에브에 대한 조르주의 위선은 단지 어느 괴팍한 한명의 노인이 부리는 추태가 아니라 유럽 전역에 고질병처럼 퍼져있는 병폐라는 것이다. 새 구성원에 대한 기존 구성원들의 반응을 꼭 유럽과 난민이라는 키워드에 국한하여 바라보지 않아도,(영화 속 에브와 난민은 서양의 세계에 갓 입장한 동양인으로 충분히 대체가 가능하다.) 영화가 시사하는 사회적 코멘트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유럽 외부의 관객들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이처럼 <해피엔드>는 겉으로 괜찮은 척 치레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이들의 무표정에 배여 있는 기묘한 뉘앙스를 조소한다. . 영화는 조르주의 위선적 태도를 곧바로 아들 토마스와 딸 안느의 위선적 태도와 이어낸다. 마치 이들의 위선은 유전이라는 비가역적 성질에 기인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에브를 냉담히 대한 조르주의 모습에 이어 곧바로 다음 숏에 등장하는 건 남사스럽기 짝이 없는 토마스의 메신저 채팅이다.(여기서 또 한 번의 정체불명 시점 주인의 매개의 숏이 등장한다.) 앞서 묘사된 말 수가 적으며 인자하며 딸아이를 친절히 대하는 듯 보이는 토마스의 모습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숏의 등장은 관객에 따라 인지부조화를 겪을 경우도 다분해 보인다. 영화는 이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지연시키다 후에 2번의 모멘트로 나누어 이를 공개한다. 무시무시한 사도 마조히즘의 채팅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의 얼굴로 두드리는 불륜녀의 모습, 그리고 조르주의 생일파티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불륜남 토마스의 모습으로. 시종 온화하고 멋있게 보이던 인물의 속내가 완전히 까발려지는 순간이다. 영화 속 토마스의 악덕이 주로 미디어의 숏인 SNS채팅에서 묘사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는 몸소 미디어의 속성을 체화하여 토마스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모처럼 아버지와 해변으로 휴가를 온 에브는 토마스에게 지금의 부인을 사랑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짐작컨대 아마 에브는 이 시점에서 이미 토마스의 불륜을 확인했을 것이다. 조금 당황한 듯 보이는 토마스는 지금의 와이프와의 만남을 에브에게 구차하게 설명해보지만 영화는 토마스의 사운드를 제거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아버린다. 영화 내에서 가장 말수가 적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게 SNS속 그의 채팅은 길게 전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내보낼지 혹은 삭제할지를 선별하는 것, 선별한 후에는 무엇을 더 길게, 혹은 짧게 내보낼지를 결정하는 것이 영화, 더 넓게는 미디어가 가진 필연적 성질이라면(추측컨대 하네케는 이러한 성질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것 같다.) <해피엔드>는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인물들을 맘껏 조롱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디어가 되려한다. 어차피 영화 또한 작가의 가치관을 사각 프레임을 통해 위의 과정을 거쳐 매개하는 하나의 미디어일 테니 <퍼니게임>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줄곧 미디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감독의 입장에선 지극히도 통쾌한 비판 방식이었으리라. . 토마스의 경우가 제일 단적인 예시일 테지만 이외에도 영화는 미디어와 인물의 병폐를 동일시하며 제 스스로 양자의 병폐를 모두 흡수한 미디어로 자리하려한다. 가령 영화에서 제일 의문을 자아내는 숏 중 하나인 피에르가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찍힌 탓에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기 전에는 해당 장면이 품은 함의를 알 도리가 없다. 1차적으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한 피에르가 피해자로 보일 뿐. 후에 안느가 피에르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가는 씬에 이르면 그제야 우리는 피에르를 구타한 사내가 오프닝 공사장 사건의 유가족임을 대충 어림짐작 할 뿐이다. 유가족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은 채 돈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 하며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안느의 위선 또한 영화의 비판 범위 내에 있으나, 그것보다도 피에르와 유가족의 에피소드는 미디어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 더 가깝다. 영화는 우리가 그토록 듣고 보고 싶어 하는 피에르와 유가족의 주먹다짐에서는 머나먼 익스트림 롱숏으로 일관하며 사운드를 일체 차단하며 상황을 모호하게 묘사했다. 허나 이와 정반대로, 관객의 입장에서 전혀 궁금치 않은 유가족에 대한 안느 쪽 변호사의 주장은 듣기 지겨울 정도로 오래 나열된다. 피해자의 의견과 주장은 묵살되며 권력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반대 측의 쓸모없는 목소리만 강하게 피력되는 영화의 상황은 우리가 예전부터 자주 봐왔던 미디어의 악한 메커니즘 아니던가. 명백한 피해자인 유가족을 순간 폭력의 가해자로 둔갑시켰던 해당 장면의 익스트림 롱숏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역전시키는데 미디어가 얼마나 용이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봐도 무방할 테다. 영화는 또 하나의 갸우뚱한 숏으로 미디어에 날선 비판을 가한다. 조르주가 휠체어를 타고 길거리를 거닐 때, 이때 역시 롱숏으로 처리된 탓에, 그리고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배재한 탓에 우리는 조르주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다. 더 이전 장면에서도 영화는 조르주가 야밤에 무슨 이유로 차를 타고 나가는지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없도록 장면을 구성했던 바가 있다. 사실 후에 전달되는 정보들로 영화의 사건들을 재구성하면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다. 이전 장면의 전말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삶에 회의감을 느낀 조르주가 야밤에 자살을 하러 갔던 것이고, 후의 장면은 이전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한 조르주가 확실한 자살을 위해 길거리를 서성이는 난민들에게 총을 구한다는 것일 텐데, 내용을 조금만 곱씹어본다면 그다지 어려울 건 없다. 허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고 사건과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는 타이밍에 긴 인터벌을 부과하여 우리로 하여금 혼동을 유발했다. 하네케는 영화 또한 하나의 미디어에 지나지 않음을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우리에게 상기시킨 뒤 그러한 미디어의 속성으로 관객을 마음껏 기만한다.(예컨대 토마스가 불륜을 정리하려는 채팅을 보낼 때 그 다음 숏에 배치되는 에브의 얼굴은 우리로 하여금 토마스가 또 다시 불륜에 들키겠구나 하는 순간의 예측을 유도한다. 영화는 이전에 병원에서 뜬금없이 불륜채팅을 봤었다고 말하는 에브의 모습을 보여줬었으니까. 허나 그 다음 숏에 배치된 에브는 조르주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이전에 에브가 토마스의 불륜을 확인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토마스의 채팅->에브의 얼굴 이라는 단순한 편집에 현혹되어 속고만 것이다.) 편의에 따라 조작이 가능하다는 미디어의 성질을 기반으로 한 관객기만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해피엔드>는 <퍼니게임>의 하나의 변용일지도 모르겠다. . 영화는 시종 미디어에 날선 비판을 가하나 사실 이러한 비판의 본 목적은 미디어 그 자체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단 그러한 불완전한 미디어의 허상에 매달려 사는 인간 군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보인다. 영화는 모호하고 아리송한 화법으로 좀 체 진실에 가닿을 수 없는 미디어의 한계와 모순을 그려냈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해피엔드>의 인물들은 그러한 미디어 내에서 제일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 과묵함으로 일관하는 평소와 달리 SNS상에선 폭언을 일삼는 토마스는 물론이고 에브 역시 SNS상에서만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다. 모순투성이인 미디어의 병폐와 미디어에만 의존하는 인간군상의 병치는 그 자체로 통렬한 세태비판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SNS에 의존하는 에브의 모습에 연민을 보내기는커녕 되려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처럼 영화는 아랫세대의 세태 또한 전혀 달갑게 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예를들어 에브의 경우를 보자면, 에브는 어머니를 독살했다. 이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방치로 인한 결과, 혹은 어머니를 미워하며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던 미성숙한 아이의 안타까운 실수로 보일법도 하지만 잔인하게도 영화는 에브가 전과가 있던 아이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금의 상황이 단순히 한 번의 실수가 도래한 결과가 아님을 방증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하며 왔다가 배반당한 에브는, 추악한 짓을 일삼는 토마스에게 아빠라 부르는 이복동생과 이 사실을 기뻐하는 새 어머니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첫 번째 식사에서 새 어머니가 한 아리송한 대사의 의미가 회수되는 대목이다. . 피에르 역시 비판의 그늘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 그는 본인의 무능함에 대한 자격지심과 어머니 안느의 위선적인 태도에 대한 환멸로 인해 극이 진행될수록 위악적인 모습과 태도로 일관한다. 누군가의 위선을 고발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선해보일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그는 상당히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조르주의 생일잔치에서, 모든 참석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모로코 출신의 이민자 가정부에게 노예라 칭하며 망신을 준다. 본 목적은 겉으론 고상한 척을 하며 뒤에선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어머니의 위선을 고발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으며 또 다른 누군가의 위선을 폭로하는 위악적 행위가 과연 위선보다 나은지는 좀 더 생각해 볼 법 한 문제다. 영화의 엔딩시퀀스인 안느의 축하연에서, 피에르의 위악적 행위는 극에 달한다. 안느의 위선을 까발리려는 피에르의 태도엔 기본적으로 나는 어머니와 다르게 위선적이지 않다는 뉘앙스가 묻어있다. 허나 이 또한 일종의 위선적 태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위선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누군가의 계급적 자존심에 흠집을 내며 동시에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피에르의 위악적 태도에는 곧 기성세대가 될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감독의 비판 섞인 한숨이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식사자리에서부터 엿보였던 안느와 피에르의 위태로운 관계는 결국 안느가 피에르의 손가락을 짓부수며 종결된다. . 대충 이 지점에서 영화를 다 보고나서 드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다. 관객에 따라 영화를 다 보고나면 그래서 대체 영화가 뭘 말하려는 건데? 라는 의문을 표할 수가 있을 것이고 나또한 영화를 본 직후에 그러했다. 부르주아의 위선, 아랫세대의 위악, SNS에 잠식된 사회의 병폐, 계급과 난민에 대한 문제, 유럽문명에 대한 날선 비판 등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어느 곳 하나 방점이 찍힌 부분이 없다는 생각도 잠시 하였고 무엇보다도 씬이 10개가 있으면 그중 8개 이상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의미를 읽어내려고 보는 입장에서 그 과다한 의미에 조금 지친다는 생각 또한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솔직히 영화를 다 보고 난 직후엔 이런 부분들이 영화의 패착으로 다가왔다. 허나 생각을 다소 정리하고 다듬은 지금 시점엔 되려 이런 난잡한 요소들이 어쩌면 영화의 성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물론 영화의 난잡한 구성이 반드시 필요했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해피엔드>는 분명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다보고 나서 좋은 의미에서 굉장히 불편하고 찝찝했다. 그러한 불편한 감정들은 어쩌면 여러 주제들을 오가며 유럽사회 문제 그 자체를 크게 스케치하는 영화의 방법론과 연출력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오가는 거지. 라는 불만은 중첩되어 결국 영화가 의도한 알 수 없는 묘한 불편함으로 전환되는데, 이런 알 듯 모를 듯 한 불편함을 심어주는 것은 영화의 본 의도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결국 영화는 기울어가는 유럽과 유럽이 기울어가는 그 이유를 다각도로 코멘트하고 있는 것이라 보이는데 그 복합적이고도 난해한 이유를 단 하나의 주제로 압축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러 테마를 오가며 주제의 넓이를 확보하는 영화의 화술은 하네케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퍼니게임>에서 제기한 미디어의 문제, <피아니스트>의 화두였던 사도 마조히즘, 등등 하네케는 전작들에서 던진 문제와 화두를 엮어 망해가는 유럽의 단면을 그려 내려한다. 여기서 제일 주목되는 하네케의 전작은 다름 아닌 가장 최근작 <아무르>이다. . . (아래 댓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