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존 포드의 <역마차>에서 확립된 로드 무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극단으로 밀고 간 궁극의 로드 무비! 이 영화를 넘어설 수 있는 로드 무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자유의 이차선>은 로드 무비를 끝장내버렸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의 제왕인 빔 벤더스도,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도 이 영화를 넘어설 수는 없다. 왜? <자유의 이차선>은 로드 무비를 끝장내버렸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차선>이 나온 이후의 모든 로드 무비는 <자유의 이차선>과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넘어설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자유의 이차선>과 똑같은 시도를 하더라도 <자유의 이차선>이 먼저 성취해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자유의 이차선>보다 뒤질 수밖에 없다. 존 포드의 걸작인 <웨건 마스터>가 가장 순수한 웨스턴에 근접해있다면 같은 의미로 몬테 헬만의 걸작 <자유의 이차선>은 가장 순수한 로드 무비에 근접해있다. 이 영화는 첫 쇼트부터 이미 길 위에 있고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길 위에 있는 것을 넘어서 영화 자체를 아예 날려버린다.(스포일러라서 표현을 자제한다.) 길은 목적지가 없는 이상 무방향성을 지향한다. 목적지가 없는 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길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로드 무비'가 길 위의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목적지가 없이 길 위에서 시작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은 채 길 위에서 끝나는 <자유의 이차선>만큼 로드 무비의 본질에 충실한 영화는 없다. 흔히 로드 무비는 목적지에 당도하거나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캐릭터들에게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길은 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 이차선>은 애초에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런 만큼 길은 수단화되지 않고 오롯이 길 자체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오로지 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순수한 운동과 질주의 굉음만이 있다. 인물들의 욕망은 불분명하며 실존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무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짐 자무쉬의 <패터슨>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무를 지향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석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사의 가능성은 확장된다. GTO로 상징되는 워렌 오츠가 뉴욕으로 갈 마음을 먹고 히치하이커들에게 영웅담을 지어내는 것도 사실 이 영화가 무의미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 명의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감지되는 성적 긴장감 또한 인물들의 행동의 동기가 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커질 수 있다. 한 여성을 향한 세 남성의 대립 양상이나 두 자동차의 대결 구도는 웨스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의미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리는 <자유의 이차선>은 단순히 로드 무비를 넘어서 영화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란 무엇인가?' (2019.2.21, 3.2 재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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