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화

지하정 : 시크릿 로맨스
평균 3.1
<지하정>의 시놉시스는 내내 당혹스럽다. 마치 로맨스극인 듯 두 남녀를 마법같이 한 공간에 붙여놓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맨스의 탈을 휙 내팽개쳐버린다. 느닷없이 일어난 한 사건과 함께 갑자기 미스터리 극으로 변모하지만, 사실 그 미스터리를 풀어낼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인다. <지하정>에게 있어서 장르의 관습이란 그저 잠깐잠깐 서사를 진행해 가기 위한 수단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물쩡 어물쩡 두 장르들을 매만지다가 전혀 다른 공간으로 훅 넘어가버린 후에, 희한한 위로를 던지며 끝을 맺는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답은 오프닝 시퀀스에 있다. <지하정>은 아무도 없이 텅 빈 홍콩의 공간들 곳곳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텅 빈 공간을 볼 기회는 오프닝 시퀀스가 마지막이다. 질식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로 내내 둘러싸여 있는 이곳.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홍콩이라는 도시 그 자체다. <지하정>은 말하자면, 도시가 주연하고 도시가 감독한 부조리극이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해서 살아가는 도시. - 이 한 문장이 <지하정> 속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어떤 사건도 이유가 없지 않고 뜬금없지 않다. 모든 사건에는 "도시가 좁아서"라는 이유가 있다. 도시가 좁아서 사랑하고, 도시가 좁아서 죽인다. 1인분의 공간도 확보하기 힘든 이 도시에서 개개인은 자의던 타의던 간에 서로의 지나치게 깊숙한 곳까지 함부로 불쑥불쑥 도달하게 된다. 이 세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캐릭터는 주윤발이 연기한 형사 란이다. 인물들 사이를 지나치게 가까이 비집고 들어오려는 란의 존재는 관객에게도 인물들에게도 불편하다. 하지만 란은 자의든 타의든, 이들 사이에 깊숙이 얼굴을 내밀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여기서도 이유는 같다. "홍콩이 지나치게 좁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회복의 공간은 뜬금없게도 대만이다. 대만의 그나마 탁 트인 풍경 속에서 우리는 영화가 주는 희한한 위로를 맞이한다. <지하정>은 청춘을 어설프게 미화할 생각이 없다. 대신에 부질없는 하루하루를 낭비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를 대책 없이 위로한다. 모두들 너무 좁은 도시에서 이리저리 한참 쓸려다니기만 했을 뿐인데, 대체 뭘 제대로 선택이나 하고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