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권
3.5

이키루
영화 ・ 1952
평균 4.0
멀지 않게 느껴지는 삶의 풍경 *스포일러 포함. 지금 시대에 보기에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나 주제 자체가 신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를 고려하면 상당히 놀랍게 느껴진다. 1952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이다. 그런 시기에 공무원의 생리를 풍자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화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머 또한 그 수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라운데, 와타나베가 위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던 병원 대기실의 대화나 여직원이 집에 방문했을 때 유발되는 진실에 대한 오해 등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구성들이다. 영화는 위암을 선고받은 한 남자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회한을 느끼고 남은 시간이나마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쌓아두어야 할 것은 남자가 느끼는 회한의 감정인데, 영화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와타나베의 표정을 활용한다. 크게 뜬 눈과 올라간 눈썹, 입꼬리가 내려간 다물어진 입을 클로즈업 함으로써 영화는 와타나베의 외로움, 두려움, 무력감 등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집요하게 유지되는 와타나베의 표정과 그 모습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카메라의 집요함은 영화의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와타나베의 회한을 충분히 담아낸다. 술집에서 만난 소설가는 와타나베에게 삶을 사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세속적 쾌락을 좇는 것이다. 그들은 파칭코에 들르고, 바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적인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쾌락의 시간이 끝날 무렵 와타나베는 물론 소설가 또한 지금까지 보낸 시간에 대해 만족스러워하기보다는 지치고 괴로워졌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소설가와의 시간은 새로운 경험이기는 했으나 와타나베가 품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여직원이 등장한다. 와타나베는 여직원과 시간을 보내며 비교적 건전한 즐거움을 누린다. 그 근원에는 여직원의 생기에 대한 부러움이 깔려있다. 자신이 지난 30년을 좀비처럼 살아온 것에 비해 여직원은 정말로 살아있는 듯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여직원에게 생기의 비밀을 캐묻는데, 사실 여직원 또한 직접적인 해답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여직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죽기 전까지 착수할 만한 한 가지 일을 떠올려낸다.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는 일이다. 와타나베가 열심히 일한 시간은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회상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연출은 와타나베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현재 속에서 직접적으로 담는 것에 비해 효율적이면서도 덜 인위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만약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직접적으로 등장했다면, 영화는 소년 만화 같은 식으로 투박하게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것은 주제 의식을 강화하기도 한다. 장례식에서의 공무원들의 대화와 의기투합, 그리고 결말부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시청의 근무 분위기는 와타나베의 빈자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와타나베의 마지막 몇 개월간과 보다 인상적으로 대조될 수 있다. 이키루는 살다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영화는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탐구한다. 와타나베는 좀비처럼 살아온 오랜 세월을 지나 시간의 끝을 깨닫고, 뒤늦게서야 제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의 직장 동료들은 처음에는 그를 무시하고 나중에는 영감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변화도 맞이하지 못한 채 원래대로 돌아온 일상에 다시금 수렴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보여준 모든 풍경(권태, 발버둥, 소동, 충동, 원상 복귀 등)이 결국 살아간다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로 감상을 정리하고 싶다. 맨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나 주제는 신선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 시대에는 이 영화가 대단히 신선한 작품으로서 처음 관객과 만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와 같은 간극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면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오래된 영화들에게는 시대를 고려한 가산점을 조금씩은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고할 수 있는 작품은 늘어나고, 따라서 이전의 작품들은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응용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영화 모임 멤버 한 사람은 <이키루>는 그런 것 고려 없이도 명예의 전당에 보내질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느껴졌을 이 영화가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1952년이었다는 점이었다. 어떤 SF소설이 미래를 엇비슷하게 예측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 시대에 이런 주제를 다룬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감상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