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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박상민

2 months ago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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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

영화 ・ 2025

1. 마젤란(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스페인으로 돌아오기 전의 파견지에서, 항해하며 지냈던 배 위에서, 마침내 도착한 필리핀 해안 마을에서 의식(ritual)을 치른다. 성상을 놓고,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올리거나 고해성사를 하거나 아내의 유령을 마주하거나 선상 판결 후 참수를 진행하거나... 일종의 의식이 계속 치뤄진다. 이러한 의식은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치른다. 백인들이 쳐들어오자 몸에 무언가를 바르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돼지와 아이들을 바다에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고, 전투 이후엔 참수된 마젤란의 머리를 들고 마을 모두가 환호하기도 한다. 성상을 모시고, 누군가를 죽이며,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행위의 변주/반복 속에서 마젤란과 원주민들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2. <마젤란>의 장면들은 폭력이 벌어지기 직전과 폭력이 벌어진 후를 비춘다. 이미 전투가 벌어진 후 널브러진 시신들이 해안을 메우고, 참수를 위해 도끼를 집어올린 숏은 이를 바라보는 마젤란의 숏으로 이어지며, 제물을 바치는 원주민들의 의식도 돼지를 향해 칼을 치켜든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에서 이미 피범벅이 된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폭력 자체를 보여주지 않을 뿐, 이 전후 장면들의 연결 속에서 관객은 폭력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오히려 폭력의 여파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장면은 스페인의 해안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선원들의 미망인들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죽음은 벌어졌지만, 관객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보인다. 폭력의 여파는 폭력의 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떨어진, 하지만 영향은 받는 장소에서 그려져야한다. 3. 마젤란의 부인(안젤라 라모스)의 유령이 갑자기 등장한다던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젤란의 노예였던 엔리케의 시점과 나레이션으로 급격히 전환된다던지 하는 지점에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마젤란의 부인 시점에서 전개되는 9시간 분량의 감독판이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걸 확인해야할 듯하다. + 엔리케의 시점은 <마젤란> 이전에 키들랏 타히믹의 <발릭바얀#1 과잉 개발의 기억 리덕스iii>라는 훨씬 뛰어난 영화에서 이미 쓰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