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비속어

비속어

7 years ag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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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 ・ 2006

평균 4.3

물론 재밌게 봤고 그 재미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옛날 작품을 볼 때면 당연히 어느 정도의 여성혐오를 감안하고 보는데도 초반에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나문희와 박해미의 모습은 너무나도 노예처럼 느껴져서 끔찍했다. 박해미는 '배울만큼 배우고 똑똑한' 노예, 나문희는 스스로 노예이기를 자처하는 노예, 신지는 자신의 처지에서 도망치다가 실패한 노예. 나문희는 갓난아기 준이를 포함해서 늘 얹혀사는 남의 집 아들 김범까지 7-10명 분의 식사와 모든 집안일을 담당하고 매 식사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반찬을 차리면서도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반찬불평을 하고 심지어 밥하나 지을 줄 모르는데도 나문희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어쩌다 박해미가 이준하를 시키는 것을 고깝게 여긴다. 박해미는 병원을 먹여살리고 바깥일도 하는데 집안일도 하지만 그를 가엾게 여기는 인물은 없다. 그가 여자고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내는 것을 극중의 인물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고 스스로도 이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그를 질투할 따름이다. 그를 선망하는 건 정반대의 성격에 있는 서민정 선생밖에 없는데 이런 선망은 이민용에 의해 좌절된다. 이순재 병원은 사실상 박해미에 의해 굴러가는데도 나문희는 그를 미워한다. 이러한 미움에 근거는 박해미의 특정 행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원은 그가 박해미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박해미는 어찌나 쿨한 사람인지 자신의 시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씨 집안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문희가 박해미를 싫어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은 아니다. 나문희는 봉을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나고 극중에서도 힘이 굉장히 센 여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한 번도 사회적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무시받으며 사니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사는 박해미가 부러울 만도. 하지만 그를 노예취급하는 건 남자들인데 나문희의 미움의 감정은 단 한 번도 구조를 향하지 못한다. 굴절질투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지킥도 그렇지만 거킥은 특히 남자들끼리 뭉치고 단합하는 것을 중요시하면서 가족끼리 우애를 다지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당연히 제외된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이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가부장적인 성향은 나아지지만 나문희와 박해미의 김치전쟁 에피소드에서 나문희가 음식에 대한 주도권을 점차 박해미에게 넘겨주는 것을 마치 가정의 실권을 상실하는 것처럼 그리고 박해미가 김치를 담자 가족들 몰래 나문희가 아들인 이민용과 합심해 김치를 담는 에피(둘이 합심한다고는 하지만 이민용은 옆에서 쳐먹기만 함)는 가부장제 속에서 집안일과 여성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동유럽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평등대신 집안일과 사회일을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거킥을 보면서 사회적인 유리천장이 깨지지 않는 이상 집안일과 사회일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트콤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남자캐릭터들은 도대체 이런 캐릭터들이 어떻게 인기가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단점이 뚜렷하다. 특히 이준하는 과부촌에 종종 가는 인물로 그려지고 박해미도 이에 분노하지만 이런 분노는 단발성에 그치고 이준하는 성매매는 하지만 순정파로 그려지고 심지어 박해미가 화가 친정으로 갔을 때 박해미의 식구들은 이준하가 너무 순진해서 그렇다며 이준하의 편을 드는 놀라운 반응을 보인다. 게다가 그는 아내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자신이 결정한다고 믿는 가부장적이면서 능력도 없는 남자이며, 어딘가 모자란 그가 아내의 말에 휘둘리는 것을 나문희는 대단히 아니꼽고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민용은 이제 막 자신의 일을 시작하려는 신지를 꼬드겨서 결혼하고 한참 커리어에 확장을 이룰 시기에 임신한 그에게 독박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게 하고는 이혼을 당하지만 여기서 '나쁜사람'이 되는 건 갓난아기를 버리고 자신의 꿈을 쫓아간 신지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모든 걸 귀찮아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강압적이다. 신지에게는 꿈을 포기하게 강압하고 서민정에게는 툭하면 소리 지르며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질투도 곱게 안 하는데 서민정 행동에 대한 통제까지 한다. 이 시트콤이 나왔던 시기에 항상 반에서 민민/윤민이 갈려서 이야기 나누던 것이 생각나는데 당시에 우리들이 신지를 어떻게 평가했었는지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이민용은 자신의 전처를 사랑해서 자극하기 위해 서민정을 이용하는 면모를 보이는데 여기서도 역시 욕을 먹고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서민정 밖에 없다. 다각관계의 중점에 있는 여성캐릭터들이 욕을 먹고 시청자들끼리는 싸움이 붙는 동안 의외로 극중에서 둘은 적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거킥에서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데 심지어 신지가 자신이 아직 이민용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서민정과 이민용의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우정을 나누고 서민정은 힘들어하는 신지에게 이민용을 돌려보낼 생각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의 성향상 어울리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인상적이었던 부분. 아마도 송재정 작가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