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죽음이 내재된 채, 관계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연약하지만 의연한 사람들. . . (스포일러) (내가 본 영화들에 한해서)아마도 홍상수는 그동안 죽음이라는 테마를 본인의 영화에 차용하길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추측의 근거를 몇 가지 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홍상수의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반복과 차이의 모티브들이 주로 활용된다. 무수히 반복되는 수많은 삶의 요소들 속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여 인물들의 고정관념, 편견 등을 비판하고 극중 인물들의 가식적인 면모를 통해 스크린 밖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투성을 공격하는 게 우리가 자주 봐오던 홍상수 영화의 전형이다. 하지만 여기에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개입하면 곤란해진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 어느 것 보다 강력한 파장을 남기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로 인해 만일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개입하면 당연히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기 마련이고 이는 자연스레 반복과 차이 라는 홍상수가 애용하는 모티브들의 질서에 혼란을 야기한다. 또한 일상의 한 부분을 단편적으로 떼어낸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을 만드는 홍상수영화의 방법론과, 기나긴 시간의 최종산물과도 같은 죽음은 분명히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이를 고려했을 때, 홍상수영화의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위의 이유들을 근거로 하여 나는 홍상수가 그동안 죽음이라는 테마를 고의적으로 피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내가 본 홍상수영화에 한해서 하는 말이다.) . 허나 비교적 근작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다다르면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 영화는 누가 보아도 죽음이라는 테마를 끼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쓸쓸하고 우울한 정서가 기저에 깔려있는 그 영화는 심지어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염원하는 여자의 이야기로도 보인다. 남녀의 술자리라는 홍상수가 자주 애용하는 또 하나의 모티브를 제외하고 보면 그 영화는 분명 이전 홍상수영화들과 다른 부분들이 많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변화의 태동을 감지하고 이번 ‘풀잎들’을 본 결과, 홍상수의 영화세계에 확실한 변화가 찾아왔다고 이젠 단언해도 될 것 같다. . 죽음이라는 테마를 회피하려고 힘썼던 지난 작품들과 달리 ‘풀잎들’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북촌방향’에서 흑백이 낮과 밤이라는 경계를 삭제하여 반복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인물의 상태를 부각하기 위해 쓰였다면, ‘풀잎들’에서의 흑백의 사용은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정조로 보인다. (카페에서 과하게 사용된 클래식 또한 이질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용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풀잎들’은 죽음의 정조가 내제된 채로 시작된다. 그 이후에도 영화에는 죽음의 기운, 혹은 죽음의 모티브들이 도사리고 있다. . 이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보다 명확히 들어난다. 영화가 시작하면 홍수(안재홍)와 미나(공민정)가 조심스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영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곧이어 우리는 이 둘의 본론이 친구의 죽음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어 영화는 아름(김민희)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린 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창수(기주봉)와 서영화(극중 이름이 없어 배우의 본명으로 표기) 의 대화로 이동한다. 이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창수가 자살을 시도한 직후의 상태이고, 갈 곳이 없어 서영화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후에 오프닝과 비슷한 맥락처럼 보이는 이유영(극중 이름이 없어 배우의 본명으로 표기) 과 한 남자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둘은 이유영의 애인이 자살한 사건, 그리고 자살한 배경에 대해 이야기 중이다. 이 외에도 종반부 술자리를 포함하여 ‘풀잎들’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죽음으로 귀결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대화 대부분을 관찰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아름이다. 아름은 관계에 서툴거나 혹은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크게 치인 경험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겉으론 예의를 차려 대하지만 왠지 날이 선 것처럼 보이고, 동생과 동생의 애인 앞에서 결혼에 대한 본인의 비관적인 가치관을 열을 붉히며 말한다. 결혼은 비유하자면 이성과의 관계에서 최종목적지에 해당하는 단계이므로 결혼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건 타인, 혹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아름이 얼마나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타인과의 관계라는 키워드는 앞서 언급한 죽음이라는 테마 못지않게 영화에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왜냐면 영화 속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속 죽음이라는 주제는 전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래된 것 이니까. 오프닝씬의 대화에서 미나가 홍수에게 “난 걔가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라고 일갈하는 장면, 창수가 한 여자와의 관계에 실패한 뒤 자살을 결심했었다는 말 등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속 죽음이라는 주제가 모두 타인과의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유영과 한 남자가 이유영의 애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말 할 것도 없다.) .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수를 범했거나 미끄러진 상태로 보인다. 이에 관련하여 가장 큰 마음속 여진을 앓고 있는 인물은 주인공 아름이 아닌, 이유영으로 보인다. 이유영과 남자의 대화 장면은 홍상수영화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장면중 하나인 남녀의 술자리다. 하지만 홍상수영화를 자주 봐온 관객이라면 해당 장면이 이례적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보통 홍상수 감독은 그러한 장면을 찍을 때 인물의 옆모습이 걸리도록 하여 롱테이크에 가까운 방식으로 찍기를 선호해왔다.(실제로 해당 장면을 제외한 영화 속 술자리는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해당 장면이 거의 끝나기 직전까지 보는 모습은 남자와 이유영의 옆모습이 아닌, 남자의 뒷모습과 이유영의 앞모습이다. 그 외에도 이전과 다른 요소들이 많다. 별다른 기교 없이 실제 술자리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만 같았던 이전 영화들에서의 술자리장면들과 달리, ‘풀잎들’에서의 해당 장면은 연출이 더해졌음을 관객들에게 마치 공시라도 하는 것 같다. 포커싱이 그렇다. 해당 장면에서 우리는 이유영의 앞모습과 남자의 뒷모습이 번갈아 포커싱됨을 볼 수 있다. 보통 포커싱은, 관객의 이목을 극중 발화의 대상에게 집중시키려고 사용되는 반면에, 해당 장면에서의 포커싱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고 임의로 두 인물에게 번갈아 사용된다. 이러한 포커싱의 독특한 사용은 그 자체로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마음 속 여진을 앓아가며 흔들리는 인물의 실존을, 초점을 잡았다 풀어주는 방식을 통해 죽음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후에 영화는, 남자의 뒷모습과 이유영의 앞모습의 반복 포커싱으로 이어지던 대화 도중에 갑자기 카메라를 왼쪽으로 패닝한 뒤, 벽면에 비친 남자의 옆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 상태로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오프닝에서 미나가 홍수를 일갈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가 이유영에게 죽음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우로 다시 패닝하면 이유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시종 뒷모습만 보이며 없는 존재로 취급되던 남자가 그림자가 아닌, 본인의 진짜 옆모습을 보여주며 씬은 종결된다. 포커싱의 반복을 통한 죽음의 대화에서 이유영은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였고, 남자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본인의 실존을 찾음으로서 승리한 것이다. . 여기까지만 보면 ‘풀잎들’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우울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바라보는 홍상수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에 죽음이라는 테마가 결합된 중반부까지의 영화는 쓸쓸하고 염세적이기 짝이 없다. 하지만 후반부에 다다르면 영화는 조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 후반부 카페에서 홍수와 미나의 모습을 오프닝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너 때문에 죽은 거야”라는 일갈에 “넌 나 한태 이러면 안 돼” 라는 말로 응수하며 싸우던 미나와 홍수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조금은 추스른 것으로 보인다. 허나 둘 사이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남아있고 분명 둘은 죽은 친구와의 관계 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도 미끄러진 상태다. 하지만 홍수와 미나는 어떻게든 서로의 관계에 다시 매달려 서로를 감싸고 있는 죽음의 정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죽을 듯이 서로에게 거친 말을 쏘아내던 오프닝과 달리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후반부 홍수와 미나의 모습은 한 발짝 떨어져 제3자인 아름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추할 따름이다. . 하지만 그런 홍수와 미나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염세적인 독백을 내뱉던 아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수와 미나의 옆 테이블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창수와 경수(정진영) 등의 일행은 아름에게 합석을 제안한다. 관계에 대한 미련과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름은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후에 아름과 경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간 뒤, 홍수가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우리는 홍수의 시점으로 미나가 술자리에 합석하여 떠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전까지 악을 쓰고 관계에 매달리던 홍수와 미나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 아름이, 본인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한 것이다. 제3자인 홍수의 시점에서 술자리에 합석한 아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번엔 홍수와 미나가 아닌 아름의 모순됨을 확인한다. . 그런데 아름이 합석한 술자리에는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아름이 합석하기 직전 경수와 창수의 대화에 주목해 보자. 경수가 창수에게 질문을 하자 창수는 “자살하고 나서” 라는 말을 앞에 붙인 뒤 답변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말 자체보다 더 이상한 건 주변 인물들의 반응이다. 아무도 이러한 창수의 이상한 말에 반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레 이야기를 경청할 뿐이다. 이처럼 태연한 인물들의 모습은 이 술자리가 죽음이 전제된 술자리임을 암시케 한다. 카페에서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뿐인 아름이 이러한 이상한 대화를 놓쳤을 리 없다. 따라서 아름은 이 술자리가 죽음의 술자리임을 알고도 합석을 한 것이다. 영화 내내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던 아름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이는 아름이 카페 밖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던 커플을 보고 외로움이 갑자기 증폭되어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동안 수많은 관계들을 지켜봄으로 인해 쌓인 외로움이 자초한 필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아름의 선택은 관객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 분명 이상하게 여겨지고 조금은 추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그렇게 죽음의 정조를 낀 채 진행되던 술자리는 정지된 흑백 스틸컷으로 종결되고 후에 앤딩크래딧이 오른다. 정적인 스틸컷의 이미지는 죽음을 달려가던 영화가 마침내 죽음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앤딩크래딧이 다 오른 뒤 우리가 보는 것은 동적인 풀의 이미지다. 이러한 영화의 앤딩은 흑백의 죽음이 내재 되어 있으면 그에 따라 필히 풀잎의 생도 내재 되어 있다는 기이한 희망을 제시한다. 흔들리는 풀잎들은 분명 위태롭다. 그리고 그러한 풀잎들 역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자장 내에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풀잎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 미끄러지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붙잡으며, 풀잎들처럼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처량하고 추하다. 하지만 그런 처량함과 추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려 애쓰는 안간힘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인물들의 태도와 행동에 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다 끝내 그러한 행동의 주체가 되는 인물의 이름이 ‘아름’인 이유는 아마 그러한 까닭인 지도 모른다.
이 코멘트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아요 283댓글 11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