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안개로 시작해 촛불로 끝나는 영화라니..🙊 안개에 대한 유별난 감흥은 <카일리 블루스>에서 고백했고, 촛불은 아무래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엔딩 무렵에 연약하리만치 위태롭지만 그만치 아름답고 따스해 보이던, 촛불의 양가적인 일렁임을 잊지 못한 탓이다. 남이 보기엔 참 억지스러운 감상이긴 해도, 영화를 볼 때면 이처럼 사소하게 와닿는 지점들이 내겐 괜히 소중하다. 어차피 영화도 감독의 사적인 투영들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그런데 타르코프스키는 왜 이런 자연물을 사랑하는 걸까. 일전에 <카일리 블루스>에다 안개가 왠지 시간도 공간도 흐려 버리는 게 어떤 시공간적인 물성으로 다가온다고 말한 적 있는데, 그 맥락을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안개를 비롯해 물이나 불, 바람 등 타르코프스키의 자연 모두가 시공간의 문제처럼 보인다. 안개가 끼고 물이 흐르고 불이 타고 바람이 부는 풍경을 가만 지켜보는 일.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순간을 붙잡는 일. 아무래도 공간의 존재와 시간의 흐름을 명백히 나타내는 순간 같다. 유동적이라는 표현에 사실 이미 공간적인 이동과 시간적인 흐름이 내포되어 있긴 하겠다. 더욱이 여타 다른 것의 상태 변화와도 다른 점이 있다면, 얼마간 공간적인 왜곡을 가져온다는 점 아닐까. 안개 너머, 물과 불의 불확정적인 움직임 너머, 스치는 바람에 공간은 어떤 식으로든 (가시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런 시공간성을 드러내는 제재는 롱테이크를 고수하며 시간의 흐름 자체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고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감독의 특성과도 잘 맞물려 보인다. <노스탤지아>도 마찬가지다. (고향으로 추정되는 공간의) 오프닝 속 안개는 인물이 현재 위치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안개로 이어진다. 이 탓에 안개가 마치 서로 다른 두 시공간을 이어주는 접합점 같기도 한데, 유황 온천의 수증기와도 겹쳐 보이는, 이 유연한 접합 덕에 이후로도 향수적 공간이 주인공에게 틈입해올 때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떤 관습적인 활용처럼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정감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이기도 할 테다. 주인공의 얼굴을 비추던 숏이 전혀 다른 시공간의 리버스숏으로 이어지는 게 가능토록 하는 안개는 결국 시공간을 흐리고 있다. 물론 안개뿐만은 아니고, 흐르는 냇물이나 책에 붙은 불과 같이 '타르코프스키적'인 다른 자연물도 비슷해 보인다. 이처럼 <거울>마냥 비선형적으로 이어 붙는 시공간 속에서 <노스탤지아>는 이중의 프레임 안을 거니는 롱테이크를 덧입힌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라는 그 감각 자체를 오롯이 느끼게끔 하는 동시에 컷 없이도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순간. 특히 긴 복도나 화면을 가르는 기둥, 아치형의 창문이나 문을 통해 형성되는 이중의 프레임은 아무래도 공간적인 분할에 일조하며 그러한 감각들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것 같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매혹을 느끼곤 하는 느린 줌인/줌아웃들. 분할적인 공간 속에서 (롱테이크로) 느리게 스미는 줌인과 줌아웃을 보자면, 문자적인 의미에서든 비유적인 의미에서든, 인물에게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 전반의 정서 탓인지 ㅡ아니면 분할적인 프레임이 주는 폐쇄적인 인상의 영향 탓인지ㅡ 이상한 불길함이나 불안, 공허마저 치솟는데, 조금 엇나간 얘기지만, 혹시 구로사와 기요시는 타르코프스키적인 공포 영화를 찍는 걸까. 어쩐지 빛이나 바람 따위를 사랑하는 것도 닮았다. 아무튼, 영화의 비선형적인 시공간, 즉 시공간을 절절히 감각케 하는 한편 마치 미로와 같이 구축한 이 영화적인 풍경은 아무래도 인물에게 닿아 심리적인 폐허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또 기요시?). 사실 해외로 망명한 감독의 처지를 투영했다는 영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시원적이고 실존적인 갈망이자 절망일 수밖에 없겠다. 특히 이런 정서는 주변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부서지고 망가져 거의 폐허를 방불케 하는 공간. 기본적으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향수의 반영일 테니, 그만큼 (뻔한 독해겠지만) 내면의 풍경과 다름없을 것 같다. 그럼 앞서 말한 줌인/줌아웃은 혹시 주변의 폐허가 내면으로 스며들고, 또 내면의 폐허가 외부로 옮겨지는 지점일까. 그런 면에서 엔딩 숏은 유난히 감격적이다. 앞서 마침내 촛불을 나르고 죽어버린 주인공을 영원에 닿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의 줌아웃은 더 이상 폐허보다 (어떤 안개와 같은 표지나 숏/리버스숏만이 가능케 했던) 불가능한 결합이 실현된 풍경을 담아 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이때 인물 앞에 놓인 물웅덩이가 눈에 띈다. 물론 그 수면은 평면적인 표면에 불과하나, 동시에 인물과 주변 풍경을 비추는 일말의 입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딘가 <거울>의 거울이나 영화를 닮은 듯한 (평면의 입체적/환영적) 확장 같기도 하고, 그간 유동적이던 물의 흐름, 그러니까 시공간적이던 움직임을 일순 정지시킨 것 같은 풍경처럼도 느껴진다. 감독의 말마따나 향수가 "시간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이 엔딩 숏, 그리고 특히 물웅덩이는 그런 시간적인 공간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노스탤지아>의 아름다움은 어떤 성스러움이 예술과 맞닿는 데 있을 것이다. 감독 자체가 그렇기도 하고, 종교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구원적으로 다가오는 엔딩의 순간은 아무래도 종교적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만, 내겐 그런 층위를 읽어낼 능력과 지식이 없는 만큼 그저 향수라는 어떤 정서적인 절망감을 시공간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에 대한 감상에만 좀 더 천착했다. 물론 이조차 오독으로 점철된 것일 테지만, 짙은 안개로 시작해 연약한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한 부단한 롱테이크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공간을 응시하는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괜한 마음이 있었다. 특히 문제의 촛불 씬. 수평적으로 왕복하는 그 간결한 운동과 8분 30초라는 수치로 손쉽게 환산되어 버리는, 그만치 간단한 시공간적인 움직임이 담긴, 장면이지만 그 순간이 주는 감흥만큼은 결코 간결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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