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chan

chan

5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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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크

영화 ・ 2020

평균 3.5

<소셜네트워크>에 이은, 그가 만든 두 번째 <시민케인> . (스포일러) (감상 후 몇달 뒤 영화를 재고하여 살을 덧 붙였습니다.) <맹크>는 <시민케인>의 창작 비화 내지는 후일담을 기대하고서 극장에 들어섰을 다수의 관객들에게 일말의 당황감을 안겨줄 여지가 다분한 영화다. <맹크>는 노스탤지어에 흠뻑 젖은 채 <시민케인>이란 걸작을 찬양하거나 경배하기보다는 되려 위대한 걸작을 빚어낸 당대의 추악한 시대상을 조소하며 일종의 비판적 반성문을 작성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타란티노의 근작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는 데이비드 핀쳐의 이 신작에도 적용해봄직한 타이틀이다. . 타란티노의 근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역사 속 피해자의 프레임에 박제된 샤론 테이트를 영화의 힘을 빌려 다시금 한 명의 영화인으로 소생시킨 동시에(이는 <맹크>가 늙은 거물의 젊은 애인으로 기억되는 매리언을 다루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인물들에게 문자 그대로의 영화적 형벌을 집행하며 역사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제 나름의 윤리를 취했다면, 데이빗 핀쳐의 <맹크>는 이미 과거가 된 역사는 수정할 수 없는 것이라 판단한 뒤 당대 할리우드의 부조리함과 악덕한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보다 자성적인 방식으로 나름의 윤리를 획득한다. . 허나 고작 1930년대 할리우드 제작사의 만행과 일련의 정치적 공작을 비판하는 성찰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에 윤리적 영화라는 상투적인 찬사를 더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가 진정 윤리적이라 할 만한 이유는 <시민케인>의 시나리오 집필 과정을 다루는 영화로서 <시민케인>의 시나리오가 지닌 미덕을 윤리적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 <시민케인>이 당대 영화계에 불러온 혁신이라 할 만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의 선형적 진행을 부정하고 사건을 뒤섞어 놓는 모더니즘적 스토리텔링이다. 다중의 시점으로 시간대를 종횡으로 누비며 내러티브를 직조하는 <시민케인>의 그 방법론이 한 인물의 삶을 그려내는 무수한 후대의 영화들에게 준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고작 영화 한 편이 한 인간의 생 전체를 담아낼 순 없다는 것. 한 인물의 생 전체를 다루는 영화라 할지언정 그건 그저 만든 이의 시점에 국한된 채 재구성된 일대기뿐이라는 것. <시민케인>은 케인을 제외한 다수의 입을 빌려 러닝타임 내내 케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하지만 생뚱맞게도 결국 우리는 케인을 알 수 없다는 식의 결말로 귀결된다. . <시민케인>을 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모든 것을 잃은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케인을 담은 숏 말이다. 거울 앞에 서있는 케인의 이미지는 딥포커스의 촬영으로 인해 후경에 배치된 거울 속의 거울로 계속하여 중첩되어 가고 우리는 하나의 프레임에서 여러 명의 케인을 마주한다. 해당 숏에서 제시되는 분화된 케인의 이미지는 이 모두가 케인이며 동시에 그 누구도 케인이 아닌 것이 되는 기묘한 역설의 감각을 내포한다. 영화가 설명하는 곧이곧대로 인물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기존의 관습에서 탈피한 뒤 인간이란 미스터리에 대해 쉽사리 예단할 수 없게 하는 구성을 선보인 것. 이것이 <시민케인>의 서사가 당대에 제시한 진정한 윤리적 혁신이 아니었을까. 딥포커스 등의 촬영 기술적 요소에 대한 상찬 역시 그 유려한 테크닉이 서사를 적절히 보충하고 있기에 지당한 상찬이다. . <시민케인>의 각본가로 등장하는 본 영화 속의 맹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시간 남짓의 영화는 한 인물의 전체를 담아낼 수 없다고. 그저 인물에 대한 인상 정도를 묘사하면 성공이라고. 이 말을 과거에 맹크가 실제로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만 적어도 시나리오에 이 대사를 기술한 감독의 아버지이자 영화의 각본가인 잭 핀쳐, 그리고 이를 토대로 영화를 작업한 감독 데이빗 핀쳐는 <시민케인>의 미덕을 정확히 인지한 채 작업에 임하였던 것 같다. . 각본을 집필하는 현재와, 집필의 동기가 되는 과거의 할리우드를 두 개의 축으로 삼으며 이를 분주히 오가며 진행되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약간의 의문점을 남긴다. 다름이 아니라 이 플래시백이 작동되는 원리가 다소 의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플래시백에서 현재로 회귀하는 지점마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맹크가 깨어나는 숏을 배치하였기에 얼핏 보기에 이 모든 플래시백은 맹크의 몽상 내지는 술기운 가득한 몽롱한 회고 정도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손쉽게 단정 짓기엔 걸리는 부분들이 많다. 가령 중반부에 등장하는 플래시백의 구성을 살펴보자. 현재의 시간대에서 맹크는 왜 하필 윌리를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를 쓰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원숭이에 대한 우화를 아냐고 반문하며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영화는 다시금 과거의 시간대로 점프한다. . 헌데 영화는 원숭이에 대한 우화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를 궁리하고 있을 관객들에게 조금 더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우리가 보는 그 직후의 플래시백에 원숭이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그리고 원숭이 이야기에 관한 에피소드의 전말은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공개된다. 만약 영화의 플래시백이 맹크의 심리에 근거하여 작동되는 것이라면 영화는 현재 시점의 맹크가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직후에 바로 맹크가 윌리에게 원숭이에 대한 은유를 통해 우회적으로 인격모독을 당했던 과거의 그날 밤으로 돌아가야 했다. 원숭이에 대한 말을 하는 현재 시점의 맹크는 당연히 그 순간 그날의 밤을 회상했을 테니까. . 플래시백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인과의 어긋남은 곧 영화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가늠케 한다.(실제로 맹크의 심리에 근거하여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따져보면, 위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두 시간대를 교직하는 논리의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인물을 아니겠다만 <시민케인>을 보았다면 다들 <시민케인>이 (얼굴이 거의 가려진 채로 등장하는)한 명의 기자가 케인의 삶을 취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영화임을 알 고 있을 테다. 이에 빗대어 말을 하자면 <맹크>는 과거의 시간대를 마치 얼굴 없는 한 익명의 기자가 30년대 맹크의 삶을 취재한 것에 대한 기록처럼 사용한다. . <시민케인>이 제시했던 형식적 미덕의 길을 따라가는 <맹크>는 인물의 내면을 대변하며 확신에 찬 답을 내리기를 거부한다. 그저 1인분의 시점에 국한된 채 인물의 인상을 남기는데 사력을 다할 뿐이다. 물론 이를 지나치게 시시한 귀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는 <시민케인>을 통해 다중의 시점을 취한다 한들 한 인간의 본질에 가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앞서 언급한 대사를 다시 빌려오자면 <맹크>는 2시간 남짓한 분량 동안에 하나의 시점만으로 인물에 대한 인상을 묘사하는데 성공한 사례다. . 과거와 현재의 시간대를 교차하는 영화의 형식이 명확한 답을 하지 않으면서도 맹크라는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느낌을 가져다준 몇몇 예시들을 언급하고 싶다. 일례로 독일 출신인 것으로 설명되는 맹크의 간병인이 과거에 맹크가 다수의 독일인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을 술회하자, 영화는 곧이어 과거의 시간대로 넘어간 뒤 싱클레어의 주지사 선거에 관해 다소 곤란한 상태에 처해있는 맹크의 상태를 보여준다. 어쩌면 맹크가 독일인들을 도와준 전례가 있다는 것은 영화의 메인 플롯과는 무관하기에 불필요한 정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저 맹크라는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던 것일까? 기껏해야 관객들에게 그가 대책 없는 술꾼만은 아니라는 정보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서? . 허나 그 이후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와 연관된 일련의 플래시백들을 계속 보고 있자면 해당 정보는 다소 다르게 해석되며 맹크라는 인물이 좀 더 다르게 보이게끔 유도한다. 영화사 간부들과의 만찬에서 싱클레어의 정치관인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맹크는 결국 거대한 권력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였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의 좌절을 바라봐야만 했다. (플래시백 이후의 시간대에서 행해졌을)자신과 별다른 관계가 없던 수백 명의 이들을 도와준 맹크의 행위를 권력에 대한 좌절을 맛봤던 과거에 대한 반발심과 사회 공동체를 중시하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그의 성향이 불현듯 발휘되었던 선행의 사례라 해석하는 건 너무 큰 비약일까? . 하지만 그것이 논리적 비약이든 아니든, 그건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건 잉여에 가깝게 제시되는 정보들이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진행되는 영화의 형식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며 인물에 대한 모호하고도 어렴풋한 인상을 창출하는 것에 있어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전 문장에서 핵심을 찾자면 바로 ‘모호함’과 ‘어렴풋함’이다. 만약 그가 독일인을 도와주었다는 정보가 제시된 뒤 과거의 플래시백에서 독일인과 관련된 그의 눈물겨운 일화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였다면 얼마나 촌스럽고 일차원적인 의미가 만들어졌겠는가. <맹크>의 괄목할만한 지점은 <시민케인>의 방법론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본인의 방식으로 변용하여 인물을 다각도로 조형해낼 줄 안다는 것에 있다. . 일차원적 연결을 거부함으로써 모호한 인상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한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종반부에 등장한다. 바로 이전에 언급한, 맹크에겐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던 원숭이에 대한 메타포 일화 말이다. 앞서 말하였듯 맹크가 원숭이 우화에 대해 처음 언급하는 것은 극의 중후반부 즈음이지만 이에 대한 내막이 관객에게 공개되는 것은 맹크가 오손 웰스와 크레딧 등록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다투던 즈음인 영화의 종반부다. . 만약 영화가 맹크의 심리에 완전히 밀착하는 형식을 고수하였다면 영화는 맹크가 원숭이 우화에 대한 말 한 현재의 시점과 그 일이 실제 일었던 과거를 곧장 교직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시민케인>이라는 희대의 걸작의 탄생 비화는 그저 맹크가 자신이 당했던 인격모독에 대해 반발하여 쓴 시나리오였다는 식으로 그 의미가 일축됐을 것이다. 허나 우리가 영화에서 본 그 모욕적 과거는, 시나리오 집필 도중이 아닌 집필 이후 크레딧 등록에 대한 언쟁의 시점과 교차된다. 인물의 심리에 근거한 인과를 배제한 채 묵묵히 이어지는 플래시백은 맹크라는 인물을 그저 인격모독에 빈정이 상해 누군가를 저격하는 시나리오를 쓴 인물이라 단정 짓지 않는다. 편집의 리듬이 빨라지며 마치 격동하는 감정을 되살리는 것만 같은 해당 교차편집의 의미는 단 하나로 일축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종 모호했던 영화의 함의에 확실한 구두점을 찍는다. . 우리는 그 순간 다수의 맹크를 마주 본다. 싱글레어의 낙선에 영화라는 예술이 악용되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예술가, 그로 인해 동료를 잃어야만 했던 예술가, 그리고 막대한 부 앞에서 최소한의 인격조차 존중받지 못했던 인간. <시민케인>이 촬영을 통해 인물을 분화시켰다면 맹크는 데이빗 핀쳐의 영화답게 편집의 메커니즘으로 유사한 맥락의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한 교차편집으로부터 파생된 인물의 인상에 대한 편린들은 왜 그는 <시민케인>을 쓸 수밖에 없었나. 가 아닌, 왜 그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물러서지 않아야만 했나.에 대해 우회적인 답변을 한다. 우리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대한 결단을 내린 예술가의 초상을 마주한다. . 이 클라이맥스의 교차편집 시퀀스를 통해 나는 핀쳐가 굳이 이 시점에서 <맹크>라는 영화를 찍어야 했던 이유를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의 유려한 공력에 시종 감탄하며 보면서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맹크>에 대한 핀쳐의 작의가 궁금했다. 영화를 보아하니, <시민케인>의 비하인드에 딱히 눈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당대 할리우드에 대한 조롱이 영화의 주된 메세지라 보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에 관해서라면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같은, 유사한 주제를 훨씬 더 다층적으로 파고든 미국 국적의 선배 영화들이 이미 즐비하기 때문에 후자의 메세지에 주력했다면 <맹크>는 그저 이전의 걸작들에 대한 첨언 정도에 불과해져 버린다. . 그러던 와중 나는 이 교차편집을 보며 내가 그동안 데이빗 핀쳐 라는 만든 이의 존재감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 코엔 형제, 제임스 그레이, 웨스앤더슨 등의 비슷한 연배의 할리우드 거장들과 달리 핀쳐는 자신이 연출한 영화들에 각본가로서 개입한 적이 없다.(본 영화의 각본가 또한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잭 핀쳐다.) 앞서 언급한 이들이 작가인 반면 그는 철저한 연출가이며, 연출가로서 그가 지닌 천부적 능력이 어느덧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각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만들며, 더 나아가 그 영화 속 구도가 자신이 각본을 쓰진 않지만 천재 감독으로서 인정받고 있는 예술가(오손 웰스), 시나리오 전체를 담당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각본가(맹크)의 대립으로 짜여 있다는 건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도식을 상기시킨다. 얼핏 보기에 데이빗 핀쳐는 극중 오손 웰즈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며 이전까지 그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던 모든 각본가들은 맹크라는 인물로 육화되어 있는 것이다. . 드라마가 각본가의 예술이라 평가받는 것이 주류인 것과 달리, 영화는 각본이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연출의 예술이라는 평이 정설에 가깝다. 감독으로서 핀쳐 역시 후자의 흐름에 힘입어 거장이라는 칭호를 달고 사는 것이 아닌가. 분명 각본은 한 영화를 관장하며 지탱하는 큰 중심축에 다름 아니며 이는 절대 무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허나 좋은 영화는 좋은 각본으로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촬영, 편집, 미술, 연기,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디렉팅. 이 모든 것은 감독의 결단에 토대를 둔 산물이다. 당장 이 영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시민케인>만 봐도 후대에 이르러 더 조명 받고 있는 건 영화의 각본이라기보다는 당대에 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영화의 연출적 요소이지 않은가. . 헌데 그럼에도, 이 영화가 한 영화를 구성하는 데 연출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담당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견 흥미롭게 느껴진다. 가령, 우리는 천재 감독으로 불리는 오손 웰즈의 천재성을 영화 내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다. 그저 한 영화의 각본을 작성하는데 본인 인생 전체를 반추하는 맹크의 고역만 영화 내내 마주할 뿐이다. 영화는 오손 웰즈를 시대를 풍미한 한 명의 천재로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그를 은근히 조롱하고 있음에 가깝게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곧 그간 자신의 시나리오를 써주었던 모든 각본가들의 노고에 대한 핀쳐의 헌사이자, 동시에 천재라는 수식을 등에 업고 살지만 정작 각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한 비하와 채찍질로 읽을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극중 맹크가 할리우드의 더러운 속성을 익히 앎에도 별 수없이 그에 순응하며 사는 자신을 시종 비하하였듯 분명 <맹크>엔 자기비하의 뉘앙스가 영화 곳곳에 어른거린다. 허나 그 자기 비하를 느끼는 주체가 오손 웰즈가 아닌 맹크였듯이, 우리는 단순히 영화의 구도를 오손 웰즈=데이빗 핀쳐로 도식화할 수 없다. . 데이빗 핀쳐. 그는 할리우드에서 소문난 고집불통의 감독이다. 지극히도 평범한 씬의 테이크를 수십 회 이상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것은 물론, 촬영 시 본인이 불만인 것의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으니 그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는 배우들만 해도 한 트럭인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듣기론, 그는 자신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인 90년대에 이미 이 영화를 만들려고 애썼다. 허나 그 계약이 성립되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가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촬영하기를 지독히도 고집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외에 그가 일상생활에서도 강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동료 영화인들이 증언이 숱하긴 하나 굳이 그러한 사담까지 끌고 오지 않더라도 그의 아집을 설명하기에 널린 일화들은 충분하다. . 그러한 인식을 견지하고 영화를 볼 때, 기존에 서명한 구두계약을 파기하면서까지 본인의 입장을 고집하는 클라이맥스의 맹크는 명확히도 핀쳐의 분신에 다름없는 것이다. 20년 전 <맹크>라는 영화를 자신의 의지대로 찍는데 실패한 뒤, 후에 기어코 자신의 고집대로 흑백의 형태로 영화를 완성시킨 데이빗 핀쳐. 30년대에 거대한 권력 앞에 굴하였다가 10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든 영화의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하는 데 성공한 맹크. 사실상 이 둘은 별다를 것 없는 가치관을 고수한 예술가들이 아닌가. 영화는 언뜻 보기에 맹크가 승리를 쟁취하며 끝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냥 그를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의 오손 웰즈와 맹크의 대립을 조금만 냉철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사실상 그 순간에 말에 어폐가 있는 이는 바로 맹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 됐든 그는 계약 위반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핀쳐가 그간 자신이 행해 온 수많은 아집들에 대해, 그 이면을 직시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럼에도 자신은 그 고집을 결코 꺾지 않을 것이라는 것. 자신에겐 물러서지 못할 선이라는 게 있다는 것. <맹크>는 승리의 서사가 아닌, 어쨌든 지지 않았음의 서사로 보아야 타당하다. 결국 제 자신을 오손 웰즈와 맹크라는 두 명의 예술가로 분화시킨 데이빗 핀쳐는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이라는 이 양가적인 감정을 한편의 영화에 모두 녹여내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 (아래 댓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