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나?
전 지구적 관점으로 다시 읽는 유럽 근대사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을까? 왜 아시아가 아니라, 왜 인도나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하필이면 유럽인가? 강대국 유럽의 등장은 필연이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 준다. 역사의 흐름을 흥미롭게 따라가면서도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학과 인접 학문이 성취한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는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포괄하는 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유럽사
기존의 유럽사 관련 책에서 전문적인 역사가들조차 유럽중심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우월한 문화적 업적을 이뤘다고 한다거나, 아시아인과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미 다 알려진 항로를 따라 다닌 것에 불과했지만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 무역에 겨우 참여한 것을 두고 ‘대항해 시대’라고 찬양한다거나, 군사적 우월성 때문에 아시아를 정복했다고 하거나, 기독교의 독특하며 우월한 정신과 문화 때문에 유럽이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거나 정치적으로 더 개혁적이었다고 과대평가하거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연원하는 고도의 지성과 문화 때문에 유럽인들이 지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저자는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와 주장이 아시아의 역사를 잘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인 것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은 극단적인 단순화와 무시로 비유럽 지역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던 반면, 유럽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상승 단계와 창의적 순간들만을 편향적으로 선택해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했다. 그 결과, 유럽의 역사는 뛰어난 지성과 직선적인 진보의 역사로 간주되었고 비유럽의 역사는 침체와 퇴보의 역사로서 유럽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굴종의 역사로 왜곡되었다. 그러나 저자에게 유럽이든 아시아든 크게 보면 전근대사회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획기적 발전 없이 주기적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사회였다. 기후, 인구, 경제, 기술, 무역 등 모든 분야는 주기적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공정하게 평가하면 주기적 변화의 틀 안에서조차 유럽은 유라시아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후진 지역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을까?
수수께끼 같은 유럽의 등장
저자는 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한 유럽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19세기 초까지도 유럽은 비유럽 지역의 다양한 지적 소산과 창의성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입은 지역이었다. 또한 유럽이라고 불리는 지역 안에서도 다양한 수준과 경향이 나타났으며, 비유럽 지역과 비교할 때 우월하기는커녕 대부분 뒤처져 있었다. 유럽에서 예외적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조차도 중국을 능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럽은 선진 지역을 추격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유럽은 비유럽의 선진 지역으로부터 물품과 기술 및 지식을 수용했고 이를 발전시켰다. 사실, 이러한 추격의 노력은 유럽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었다.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무역과 교환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노력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후진성에서 출발한 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인구 증가와 사회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이나 과학에서 아시아보다 우월하지 않았던 유럽이 세계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 혁신을 가능케 하는 영국의 관용적 환경 때문에 우연히 나타난 결과였다.
이 책은 강대국 유럽의 등장은 어떤 점에서든 세계의 다른 지역 혹은 문명에 대해 가진 우월성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유럽인이 아시아 주요 사회의 구성원보다 더 부유하거나 과학적으로 더 진보하지 않았으며 우월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혁신과 관용
이를 위해 저자는 여섯 가지 요소들을 나열하고 이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강대국 유럽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섯 가지 요소는 고전고대의 전통과 종교적 전통을 의문시하고 결국에는 이를 거부한 유럽의 경험, 자연 세계에 대한 실험 연구와 수학적 분석을 통한 과학적 접근 방법의 발전, 증거와 논증 및 과학 탐구에 관한 경험주의의 승리, 기구器具에 기반한 실험과 관찰의 접근 방법 개발, 관용과 다원주의의 풍토 및 새로운 과학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지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가 정신에 대한 관대한 지원 및 지식인들의 긴밀한 네트워크다.
책 전체에서 이 여섯 가지 요소들은 다양한 논점과 관련되면서 적절하게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속적인 혁신의 문화와 관용의 풍토다. 전통과 억압된 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고 창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과학 탐구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과학적 적용을 가능케 했던 지속적 혁신과 관용이야말로 전근대 사회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 한계를 넘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했다. 동시에 이 획기적인 발전은 전 지구 사회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는 근대성이 어떻게 유럽에서 실현되었는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