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고전의학의 만남, 리라이팅 『동의보감』으로
몸의 재발견, 삶의 대반전을!
2003년 지금, 여기에서 고전을 다시 읽는 리라이팅 클래식 1번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전국적인 “열하일기” 붐을 몰고 왔던 고미숙이 이번에는 고전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삶의 비전을 탐구하는 인문의학서”로 다시 읽어 냈다. 지난 10여 년간 『동의보감』 세미나와 더불어 현대인들이 당연시 여기는 삶-습속에 천착해온 고미숙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만 의지하고 병이 왜 생겼는지, 그것이 내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현대 의학담론의 배치와 우울증 및 불안감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심리를 횡단하며, ‘고전의학서’의 아우라에 갇혀 있는 『동의보감』을 현대 삶의 치유서로, 더 나아가 우리 각자를 “앎의 주체”로 일깨우는 “인문서”로 자리매김 한다.
사실 2007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출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행해진 고미숙의 행보는 “삶과 습속의 혁명가”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현대인의 “증상”들이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고전문학을 넘나들며 파헤치고 지금부터 자기 삶의 “앎의 주체”가 되는 공부를 통해 “자기배려”로 나아가자는 그녀의 주장은 계층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고미숙은 『동의보감』의 세계로 들어갔고 앞으로도 삶의 인문학과 고전의학의 접점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갈 예정이다. 이런 그녀의 행보는, 언뜻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를 떠올리게 한다. 푸코 역시 현대인이 당연시 여기는 지식(앎)의 배치에 대해 연구했으며, 말년에는 고대 그리스철학에 천착해 현대의 삶에 대해 문제제기한 바 있다.
고미숙은 이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의 차이에 주목하며, 이 차이에 의해 한쪽은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한쪽은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성찰과 연구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고 말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할 때 내린 당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_본문 39쪽 참조)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다. 『동의보감』의 탄생 자체가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모두가 그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고미숙은 이런 『동의보감』의 취지를 더 밀고 나가 이렇게 주장한다.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워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자!”
아울러 고미숙의 『동의보감』 리라이팅 작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서 2013년 발간 400주년을 맞는 『동의보감』이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나 음식 관련 처방에만 활용되는 데서 벗어나, “왠지 답답하고 화나고 불안한” 현대인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데 활용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몸과 우주 -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 차이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 본문 20쪽
『동의보감』은'신형장부도'라는 한 남성의 (몸통)측면을 그린 그림과 함께 바로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의학서인데, 우주와 몸에 대한 글로 시작되는 것이다(위 글을 쓴 사람은 당나라 때의 전설적인 명의 손사막이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는 언술은, 동양의학의 사유체계가 어떤 땅에 발 딛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 준다.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우주(자연)와 인간의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산업화된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에서는 마치 사회의 전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듯, 자연과 신체도 분리된 ‘개체’로 여긴다. 그렇기에 우리 신체의 각 부분도 기능별로 분화하고, 또 의학의 체계도 그렇게 짜여 있다(소화기, 순환기, 내분비, 비뇨기 등).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이 ‘의심할 수 없는 나’인 것과 지금의 서양의학 담론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개체에 대한 탐구, 그것은 서양 근대에 제반 분야에서 모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해부학이 발전했던 것이다. 드라마'허준'(원작 소설 『동의보감』)에서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바로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듯한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지금까지 많은 동양의학 전문가들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이것은 서양의학적 지식에 기반한 상상이다. 동양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정(精), 기(氣), 신(神)이 접속하고 변이하는, 자연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해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또한 서양의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연결시켜 말하지만, 『동의보감』을 비롯한 동양의학에서는 놀랍게도 오장육부와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기쁨을 주관하는 것은 심장이고, 슬픔을 주관하는 것은 폐이며, 화(분노)를 주관하는 것은 간이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상사병으로 밥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여인에게 화를 내게 해서 뭉친 기를 풀어 주는 치법(治法) 사례부터 이와 유사한 예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고미숙은 이처럼 몸과 우주에 대한 시선에서부터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이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론을 짚어 가며, 동양의학 담론의 특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양의학의 우수함이 아니다. 서양담론의 배치가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 자체를 차단한다면, 동양의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지금 누구보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라는 것이다.
삶의 비전 - 자기 몸에 대한 탐구 없이는 삶도 없다!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다. 슬픔은 침잠하는 음기이고. 그래서 전자는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복은 내탓이고 화는 남의 탓이 되는 것도 이런 원리다. 사랑의 기쁨은 산산이 흩어지지만, 사랑의 아픔은 천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런 법칙의 산물이다.
…… 특히 현대인들은 그 임계점을 넘어 버렸다. 쇼와 이벤트에 길들여지다 보면 기쁨은 더 이상 쾌락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의 성향은 업!되지 않으면 다운된다. ……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구조가 심화되면 어떤 일을 겪어도 상처가 되어 버린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감정의 회로가 기억이라고 했다. 자의식이라는 구조와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 이런 조건이라면 어떤 사람도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기 마련이다. 암과 우울증, 그리고 자의식.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삼종세트다. 이런 몸으론 외부와 부딪힐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 본문 265쪽
연암 박지원은 젊은 시절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민옹’이라는 거리의 철학자를 만나 병을 고치게 되고, 그 치유의 과정을 담은'민옹전'까지 남겼다. 민옹이 박지원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한 일은, 두 가지였다. 잘 먹게 하고 웃게 하고 잘 자게 한 것. 식욕이 있고 달콤한 잠을 자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