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의 고유성과 초월성을 수호한
실존철학의 대장정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독일 실존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대표적 철학자이다. 실존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철학자가 바로 야스퍼스이고, 하이데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철학계의 연구는 지나치게 하이데거 철학에 편향되어 있는 상황이다. 야스퍼스는 1913년 『정신병리학총론』을 출판한 이후 56년 동안 철학, 정신의학, 사회학, 국제정치학, 예술, 문학, 교육, 신학 등의 발전에 기여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서들과 논문들을 의욕적으로 저술했다. 야스퍼스 철학이 실제로 지니는 영향력에 비해 한국 철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그의 학문적 업적은 정치철학, 사회철학, 철학교육 등은 물론 특히 철학상담, 정신병리학, 실존분석적 정신요법 등의 분야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선구적으로 연구한 것에 있다. 그런데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야스퍼스의 저서들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주저들인 『철학 I, II, III』(1931), 『세계관의 심리학』(1919), 『진리에 관하여』(1948) 등을 제외한 저작들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학 I, II, III』은 전 3권으로서 야스퍼스 저서 중 야스퍼스 철학과 실존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방대한 저작이고,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야스퍼스 철학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학문적 기초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야스퍼스 철학에서 지금껏 소개되지 않아 미진했던 부분들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학문적 균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전 3권인데, 제1권은 철학적 세계정위, 제2권은 실존해명 그리고 제3권은 형이상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철학』은 세계, 실존, 초월자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철학』 1권에서 야스퍼스는 과학에 있어서 절대적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실제로는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과학을 이끄는 탐구 방법들은 완전한 세계상을 구축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과학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세계인식을 가지고서는 인간의 현존을 포괄하는 전체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활동의 한계를 규명하며 나아가 정치, 문화,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의 모든 절대화의 시도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제1권 철학적 세계정위의 목표이다.
『철학』 1권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철학』 2권은 『세계관의 심리학』에서 적용했던 심리학적 방법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저서에서 야스퍼스는 철학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현존에서 본래적인 자기존재, 즉 실존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방법적인 전개가 무엇인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2권은 인간 삶의 실존적 조건, 실존적 상호소통을 주제로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심리학적 혹은 정신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철학상담 분야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철학』 3권은 초월과 초월자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야스퍼스는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세계 내 존재자들이나 자기 자신의 존재인 구체적 실존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초월자 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규명한다. 이러한 초월함을 통해 세계정위나 실존해명에서 다루었던 역사적 측면과 자기 고유의 존재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적인 행위와 좌절 속에서 초월자라는 본래적인 존재에 이르게 된다. 본래적인 존재에 이르는 과정은 실존의 암호해독의 과정인데 이 암호해독은 실존분석적 정신요법의 핵심인 의미정립과 연관된다.
『철학』 전 3권의 번역은 구체적인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해야 한다는 철학의 본래적인 요구에 부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철학상담과 상호문화 철학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는 지적 원천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또 실존철학과 현대 유럽철학의 연구에 균형을 회복한다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 효과
첫째, 학문적 측면에서는 국내 야스퍼스 철학 연구와 실존철학 및 현대 유럽철학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후속 연구를 자극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철학, 정치학, 사회학, 신학, 정신병리학 및 철학상담, 교육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야스퍼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탄탄한 초석이 비로소 마련될 것이다.
둘째, 사회적 기여의 측면에서는 자아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자기 확신과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깊이 있게 삶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야스퍼스 철학을 통해 의미실현의 철학적 방법론이 제공된다면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다. 야스퍼스는 스스로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며 살아간 철학자였고 나치 시대를 경험한 이후로는 나치를 허용한 독일 국민의 정치적 책임 문제, 통일 문제 등 당대의 현실 문제를 철학적 지평에서 분석, 조망하였다. 독일의 상황을 고찰한 야스퍼스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 책은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철학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과학주의와 맹목적 반이성주의의 독단에 맞서 매우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철학함의 모델을 보여 주는 부분은 일반인들을 위한 철학 교육에 활용될 수 있고, 야스퍼스의 실존분석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철학상담이나 상호문화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로도 제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