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국가가 조작한 ‘재일 교포 간첩’으로 살아야 했던 세월,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고자 거듭 기억해 남긴 한 인간의 기록 “그는 초라하리만치 참 자그마한 체구였다. 어눌한 한국말이었지만, 차분하고 담담하게 과거를 밝히는 무척 꼼꼼한 ‘간첩’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만났다.” ― 조영선(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우리 태홍이는 언제 돌아오나요? 내가 살아 있을 때 돌아올 수 있을까요?” ― 고 심복수(김태홍의 어머니) 청년은 납치되었다. 대문 안쪽 하숙집 사람도, 5분 거리 학교 강의실에서 막 수업을 시작했을 교수와 동료 학생도, 저 멀리 일본에 있는 가족도, 아무도 청년이 납치된 사실을 몰랐다. 청년 자신도 납치인 줄 몰랐다. 친구 일로 잠시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한 달여 뒤부터 모든 신문이 청년을 간첩으로 대서특필하기까지 청년은 현실에서 증발했다. 그날 낮 3시를 채우던 공기가, 하숙집 대문과 담벼락이,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던 골목길이 청년을 목격했을까. 죄 없이 15년을 교도소에 갇힐 스물다섯 살 청년 김태홍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나는 김태홍입니다 :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나를 흔들어 댈 때,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일본 학교에 다닌 교포 학생들은 대부분 우리말을 할 줄 몰랐다. 나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우리말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았다.” “납치와 고문, 불법 구금, 사형 구형에 무기형 선고와 확정, 무기형에서 20년 형으로 감형, 그리고 15년 만에 가석방. 보안사 갈월동 분실과 서빙고 분실, 서울구치소, 광주교도소, 대구교도소, 대전교도소. 저 시간과 저 공간을 거쳐 오는 동안, 스물다섯 청년은 어느덧 마흔 중년이 되었다. 스물의 몇 해와 서른의 전부를 꼬박 갇혔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 자랐고, 민족의식이 강한 부모의 영향으로 일본식 성명인 통명 대신 본명으로 살아온 ‘재일 교포 2세’.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급우가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듯 부른 ‘조센진’. 대학을 나오고 성실함을 인정받아도 정작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하던 형들과 누나를 보며 일본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삶을 펼치길 꿈꾼 ‘한국인’. 불법 체포된 1981년 9월 9일부터 가석방된 1996년 8월 15일까지 약 15년, 5455일 동안 조국의 교도소에 갇혀 지낸 ‘간첩’. 2017년 11월 23일, 영장 없이 체포된 지 36년 2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재심 최종 무죄가 확정된,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의 ‘무고한 피해자’.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여러 이름들로 불리며 살아야 했던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기 위해 오래 기억하고 기록한 책으로 고국의 독자에게 처음 건네는 말. “나는 김태홍입니다.” 기억에서 기록으로 : 15년 동안 기억해 기록하고, 다시 20여 년 세월이 지나서야 꺼낸 이야기 “일본에서 살면서 아무리 어려움을 겪었어도, 한국에서처럼 그렇게 지독한 짓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 충격이 너무 컸다.” “나는 기록하지 않고 기억했다. 감옥에 갇힌 내게는, 기록보다는 기억이 무난했다.” “갇힌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각자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는지 가능한 대로 기회를 만들어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려 애썼다. 어떤 일을 잘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일을 몇 번이고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운동 시간에 운동장을 달릴 때나 방에서 요가 운동을 할 때 늘 중요한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 짓지 않은 죄로 기약 없는 수감 생활을 하게 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김태홍은 잊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을 취조한 국군 보안사령부 수사관들과 기소한 검사의 이름을 기억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교도관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같은 방에서 지내거나 통방하며 알게 된 양심수, 일반수, 도움을 주고받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들이 한 행동, 그들과 겪은 일, 그들에게 들은 사연을 기억했다. 집필이 허가되지 않았고, 허가된 뒤에도 검열을 피할 수 없던 곳에서는 기록보다 기억이 정확했다. 석방되고 일본으로 돌아가 정착한 뒤, 15년 동안 기억한 시간을 2년에 걸쳐 기록했다. 일본어가 더 익숙한 그가, 한국어로 나누며 기억한 이야기였기에 한글로 적었다는 원고는 그대로 20년 가까이 간직되다가, 이후 재심 변호를 맡은 조영선 변호사의 제안과 박수정 르포 작가의 정리를 거쳐 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옥중 기록이 대체로 필자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일기, 편지글, 탄원서 등의 형태를 띠는 데 반해 이 책은 건조하고 담백한 관찰 기록에 가깝다. 감정과 주장을 내세우는 대신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주로 담았다는 점에서, 수감 생활을 하며 길어 낸 성찰과 사색에 기초해 집필된 기존 출판물과도 사뭇 다르다. 『나는 김태홍입니다』는 민주화의 전망이 싹트는 동시에 (사회는 물론 저자 개인에게도) 여전한 불안이 남아 있던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풍경과 교도소 안에서 마주친 인간 군상의 삶을, 부러 과장하거나 앞서 판단하지 않고 기록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떤 순간들에는 한 시대의 역사가 깃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늘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이 기다림에 지지 않는다 : 그리고 또 다른 ‘김태홍들’ “오전 9시 30분. 교도관이 왔다. 문이 열렸다.” “석방되었을 때 기쁨은 컸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도 들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해봤을 뿐이다. 그동안 크게 변화한 일본 사회에 적응해 새롭게 경제 기반을 만드는 일은 꽤 어려웠다. 하지만 긴 감옥살이를 무사히 끝낸 나는,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일본으로 벌써 돌아왔는데 꿈속에서는 감옥에 갇혀 ‘아, 언제 나가나’ 하며 고민하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고는 ‘아이고, 집이구나’ 하고 안심했다. 이렇게 감옥에 갇힌 꿈을 석방되고도 5~6년은 꾸었다.” “언제 감옥에서 나갈지 모른 채 기다린 시간이 15년이었는데, 재심을 청구하고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했다. 늘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이 기다림에 지지 않는다.” ◈ 15년 만에 교도소를 나섰고 꿈에 바라던 자유를 얻었다. 영화나 드라마라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지만, 삶은 이어진다.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제, 수감된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생계를 꾸리며 살아온 60대 중반의 생활인이 되었다. 2018년 1월까지 일본 고베의 제화(製靴) 업체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요새는 텃밭에 유기농 작물을 심고 돌본다. 그사이 다른 재일 교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했고,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꾸준히 공부하며 실천한 건강 지식을 정리해 일본에서 책도 냈다. 무너져선 안 된다고 다짐하며 수감 기간 내내 운동과 건강관리, 간헐적 단식을 한 덕분에 몸은 오히려 좋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는 갇힌 시간의 흔적이 남았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80년대 초반에 특히 간첩단 날조 사건이 많았다. 군사 쿠데타로 장악한 정권을 유지할 방법 중 하나였다. 비교적 사상의 자유를 누리던 일본에서 조총련과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고 북한에 간 가족을 둔 재일 교포는 손쉬운 공작 대상이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김태홍의 일본 집까지 찾아가 챙겨 온 ‘일본제’ 추리닝을 ‘북한에서 하사받은’ 결정적인 증거물로 법정에 제출했고, 판사는 이를 증거로 인정했다. 재일 교포 간첩단 조작 임무에 열성을 다한 공로로 2000만 원 남짓한 포상금과 수사관 두 명에게는 훈포장(勳褒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