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보이지 않는 주홍 글씨, 계급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문화비평가이자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누구도 감히 먼저 말하지 않았던 ‘계급’을 국가와 개인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었다.
벨 훅스는 미국의 빈민 3,800만 명 중 대부분이 백인인데도 왜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하면 흑인을 떠올릴까? 부의 힘이라는 환상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가난하게 만드는 걸까? 부유한 흑인은 부유한 백인보다 계급에 대해 더 많이 알까? 왜 우리는 항상 많은 돈이 필요할까 같은 의문을 계급과 인종,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 에세이 형식을 빌려 풀어가고 있다.
IMF 이후 ‘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여겨져 왔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합심해서 나라와 경제를 살리는 데 ‘계급’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소영’과 ‘강부자’가 의미심장한 유행어가 된 오늘, 우리는 서로의 계급이 불편하지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와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판자촌 구룡마을은 한국 사회에서 ‘부’와 계급의 상관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의 ‘국민’들은 몇 십 억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가 공존하는 현실을 앞에 두고 ‘계급 없는 사회’란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회복되기 힘든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 사회에 과연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은 과연 ‘계급 없는 사회’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이 빈부 차가 커지고,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돈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다. 그들은 오랫동안 미국은 열심히 일을 하면 누구나 정상에 설 수 있는 ‘계급 없는 사회’라고 믿었다. 그런데 계급 없는 사회에 정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인들은 사람들 사이에 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계급 차이와 계급주의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양한 계급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지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Sicko'를 통해 폭로되었지만, 평등과 기회의 땅 미국에서 부유하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 계급으로 군림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계급 없는 사회’ 미국을 믿고 있는 이들은 바로 그 특권 계급과 정치인, 언론의 카르텔이 형성한 거미줄에 걸린 사람들이다.
안타깝게도 미국을 닮지 못해 안달이 난 한국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과 흡사한 상황이 적지 않다.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한 보안 속에 살고 있는 미국의 부자들은 엄격한 경비 시스템을 적용하는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강남의 고급 아파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가난하고 힘들며, 오랫동안 일해도 여전히 먹고살기가 빠듯한 3,8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을 국가가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미국과 결식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40만을 육박하고, 그나마 방학에는 지원마저 끊기는 한국은 딱 들어맞는 퍼즐 같다.
미국과 한국 모두 소득과 학력 등 ‘물질적 부’를 끌어올리는 수단이 없으면 ‘유전무죄’와 가난, 학력을 포괄한 계급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미국은 ‘계급 없는 사회’일까?
침묵을 거듭하는 사회에서 계급은 더 이상 사어死語가 아니다.
벨 훅스는 빈부 격차 해소와 계급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미국 사회는 머지않아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또한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하는데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비정규직과 88만원 세대를 비롯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투쟁 등 한국 사회의 계급투쟁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변화하는 계급 현실이 불안을 야기하며 개인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위협적이고 정치적인 변화이다.
벨 훅스는 이 책을 통해 계급에 대한 침묵을 거듭하는 미국에서 계급주의가 어떻게 페미니즘을 훼손했는지, 빈곤층과의 연대는 무엇인지, 소비주의와 탐욕의 정치는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치며, 왜 여전히 ‘계급’이 유효한 문제인지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돈’과 ‘탐욕’의 관계를 추적하고, 인종과 성gender에 따른 또 다른 계급 차별을 지적하며, 공동체와 단순하게 살기, 빈민층과의 연대, 공정한 경제 체제 구성 등 다양한 방법론을 풀어내고 있다.
‘계급 없는 사회’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미국의 계급 문제는 ‘강부자’와 ‘고소영’이라는 신흥 지배 계급이 등장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벨 훅스가 고발한 미국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린 양극화와 계급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 왜 지금이 계급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인지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