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는 공공 산책로이며 만남의 장소였다. 봉안당 옆에는 상점이 있었고 회랑에는 수상쩍은 여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축제도 여기에서 열렸다. 이렇게 묘지에서 전율을 느끼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의 묘사처럼, 중세 프랑스 파리에서 묘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가장 생기가 넘치는 도시 한복판에 공동묘지가 자리했다. 묘지는 항상 상인과 호객 행위를 하는 매춘부로 떠들썩했고, 시민들은 그 주위를 자유롭게 활보하며 일상을 보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사이, 파리의 묘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세기 중반 오스만 남작은 파리를 전통 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키고자 묘지 개혁 계획을 수립했다. 파리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묘지를 옮기려는 의도였지만, 이는 시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시 당국은 죽은 자를 삶의 터전 가까이에 두고 그들과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현재까지도 남아, 도심 속 묘지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 사회의 서울 역시 죽은 자를 경외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상을 경외하며 숭배하는 태도는 제사, 성묘 등 더욱 관습화된 의례 문화로 발전해나갔다. 마을 인근에 공동묘지가 자리를 잡았고, 백성들은 수시로 챙겨야 하는 행사가 아니어도 일상적으로 이곳을 찾아들었다.
그러나 서울과 묘지의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군사 시설, 광산 개발 시설 등을 이유로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묘지는 점차 서울 밖으로 밀려났다. 해방 이후에도 학교와 주택, 공장을 짓는 데 걸림돌로 인식되면서 유배를 떠나듯 멀리 도시 밖으로 옮겨졌다. 묘지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 결과 오늘날의 도시인들은 죽음을 피하고 꺼리며, 삶과 완전히 분리된 특별한 사건처럼 여긴다. 죽음이 추방당한 서울은 화려한 불빛과 즐거운 일들로 가득하지만, 망자의 곁에서 지난날을 돌아볼 공간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빛으로만 가득한 공간에선 오히려 빛의 존재를, 그 소중함을 알 수 없듯 우리도 죽음을 기억하지 않고서는 삶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1년에 두어 번, 큰일이 있을 때만 묘지를 찾는다. 몇 시간이 넘게 달려 묘지를 방문하지만 머무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파리의 공동묘지들은 ‘묘지투어’로 불릴 만큼 관광명소로 인기가 높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묘지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파리 사람들처럼 죽은 자 곁에서 조용히 삶을 성찰할 기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