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전, 정보전, 사상전의 비중이전례 없이 중요해진 현대전의 개시와
더불어 전쟁과 미술의 관계는 어떻게 바뀌었나?
유사 시대 이래로 예술가들은 전쟁을 주제로 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흔히 역사화(歴史画)라는 범주에 포괄되는 전쟁화(戰爭畵)가 그 대표적인 성과이다. 전쟁의 실상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든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달하기 위해서든 예술가들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가히 기념비적이라 할 만한 성과를 후대에 남겼다. 이런 작품들은 미술사 내에서도 위대한 예술가들의 숭고한 정신이 빚어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아왔으며, 따라서 전쟁이라는 소재와 미술이라는 활동이 서로 연관되는 데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 들게 하지 않았다.
전쟁과 미술은 흔히 서로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활동으로 보이기 쉽다. 전쟁이 명령과 강제에 따른 일사불란한 집단행동을 요구한다면 미술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반을 둔 자율적 활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과 미술의 관계는 현대전이 개시되는 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심리전, 정보전, 사상전의 비중이 전례 없이 중요해진 현대전에서 전쟁은 미술에 전혀 다른 역할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미술 활동의 주객을 전도시켰다. 예술가들이 전쟁이라는 소재를 자율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전쟁이 예술가들에게 특정한 예술, 특정한 역할을 강제한 것이다. 프로파간다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미술은 전쟁 이후의 사후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쟁의 연장선에 놓인 활동이 되었다. 프로파간다로서의 미술은 전쟁의 최전방을 무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의 개인의 삶과 욕망도 통제하는 막강한 어떤 것이었다.
『전쟁과 미술: 비주얼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무대이자 치열한 심리전, 사상전, 정보전의 전장이기도 했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미술이 떠맡고 미술에 부여된 새로운 역할을 입체적으로 조명해보는 책이다. 미술은 이 전쟁에서 프로파간다 매체로서의 활약을 유감없이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침략을 받은 중국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전쟁의 위협 아래 놓여 있던 호주 같은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만주국에서도 예술가들은 식민 모국인 일본 본토와의 연관성 속에서 프로파간다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각각의 지역은 정치적 상황, 물질적 수준, 테크놀로지의 가용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른 양태의 미술 활동을 펼쳐보였다.
『전쟁과 미술: 비주얼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전쟁 미술의 범위를 회화와 조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전쟁이 프로파간다로서의 성과를 위해서라면 전쟁 미술의 고전적인 범주였던 회화나 조각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쟁 미술을 대표하는 회화, 조각을 비롯해서 사진, 벽화, 만화, 포스터, 우표, 영화, 상품 디자인 등 시각문화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비주얼’의 개념에 입각하여 예술 활동에 투영된 전쟁의 속성을 입체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미술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이념의 각축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과 욕망을 조직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 미술이 비록 프로파간다로서의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들 작품을 순전히 프로파간다로서만 간주하기는 어렵다. 예술가가 개입해 생산한 이들 작품에서도 예술작품 일반에 수반되는 표현과 형식, 매체, 양식 등의 미학적 문제를 결코 도외시할 수는 없다. 또한 이들 작품 중에는 예술가들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작품도 있지만 고전적인 전쟁 미술처럼 예술가들이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만든 작품들도 많다. 평가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술 활동을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전쟁과 미술』은 미술에 투영된 침략 전쟁의 속성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저항하는 정신의 표출 양태, 그리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다양한 시각적 장치들, 나아가서 미술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에 이르는 복잡다기한 문제들을 성찰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