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갈등에 따르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예견한 소설!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의 영원한 고전 ‘쥘 베른 걸작선’ 여덟 번째 작품
출간!
1879년에 씌어진 이 작품은 국내에 최초로 완역되어 소개되는 쥘 베른의 소설로, 정치.과학과 관련된 세계 정세와 도시 풍경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근거한 19세기 말 유럽의 당시 구체적인 시대상이 세세하게 그려진 <인도 왕비의 유산>은, 전쟁에 사용되는 미래의 무기 개발, 21세기를 연상시키는 도시 계획 등을 실감나게 펼쳐보이고 있다. 역동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 사라쟁 박사와 마르셀 브뤼크망이라는 청년을 통해 쥘 베른 특유의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바탕이 된 모험기가 이 책의 내용을 이룬다.
“쥘 베른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견을 했다”고 H. G. 웰스는 말했다. 베른의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갈등에 따르는 20세기, 21세기의 문제를 예견하고 있다. 그 예견들은 물론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의 근거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독일 군국주의의 위험을 베른에게 확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기계화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동시에 그는 과학과 발명의 잠재적 가능성도 깨달았고, 도시 계획에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쥘 베른은 아마 인공위성 발사를 처음으로 상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해설’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독일과 프랑스의 민족 간 감정을 배경으로
평화와 행복에 대한 인간의 꿈을 구현한 빛의 공동체 프랑스빌과, 권력과 정복에 대한 인간의 꿈을 구현한 강철 도시 슈탈슈타트. 이것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양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 본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이기도 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이후 1879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전쟁 이후 독일과 프랑스의 민족 간 감정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존재한 민족 간 감정의 리얼리티는 섬뜩할 정도였고 특히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에 대해 베른은 통절한 감정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알자스 젊은이’ 마르셀의 활약과 복수는 결국 베른 자신의 한풀이나 다름없다. 베른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독일 군국주의의 시도, 국민의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정치 경찰이 횡행하는 국가의 등장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슐츠 교수를 묘사한 삽화가 콧수염을 없앤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21세기의 사상, 과학기술, 예술 예견
베른의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갈등에 따르는 20세기, 21세기의 문제를 예견하고 있다. 전쟁이 기계화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동시에 그는 과학과 발명의 잠재적 가능성도 깨달았고, 도시 계획에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쥘 베른은 아마 인공위성 발사를 처음으로 상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인공위성은 베른이 보여주었듯이 결국 전쟁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베른은 가스탄과 소이탄을 멀리 쏘아 보내는 장거리 포격의 위험을 예견했으며, 대규모 대피 계획과 민방위대 편성으로 그 위험을 중화하려는 시도는 소방 장비를 제공했다. 미래 전쟁이라지만, 원자력도 발견되기 전인 19세기 말이면 어떤 신병기도 목가적이다. 포탄이 지구 대기권을 탈출하는 속도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낙하할 수도 없는 속도를 얻었기 때문에 인공위성이 되어버린다는 것, 슐츠 교수가 액체 이산화탄소가 기화할 때 흡수하는 기화열 때문에 얼어 죽는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참신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도시 계획에서도 베른은 근대의 도시 설계를 앞질렀다. 프랑스빌은 금속 주조용으로 개조할 수 있는 ‘용광로’에 연소의 부산물을 이용하여, 연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근대의 무연지대를 능가하고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인도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독일인들이 프랑스인을 학살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듯이 프랑스인이 독일인을 죽이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프랑스를 정복한 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사라쟁 박사의 말―“그들은 보기 드문 재능을 왜 같은 인류를 위해 쓰지 않았을까?”―에 표현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