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 모더니스트 이상
“한국어로 쓰인 가장 격조 높은 산문”(김윤식) 「권태」를 비롯해
작가의 대표 단편 소설과 산문을 골라 엮은 작품집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의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권태」에서
■ 편집자의 말: 왜 이 작품을 소개하는가?
‘천재’, ‘광인’ 혹은 ‘모던 보이’라고 불리는 이상은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실험적 구성과 파격적 문체를 통해 식민지 근대 한국과 동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내면 심리를 형상화한 뛰어난 소설가, 즉 산문가이기도 하다. 이상은 소설을 가리켜 “무서운 기록”(「십이 월 십이 일」)이라 했고, 덧붙여 “최후의 칼”을 들고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의 싸움에서 얻어 낸 것이라고도 했다. 결국 이상에게 소설은 ‘운명과도 같은 글쓰기’였고, 산문은 ‘처절한 자기 고백’이었다.
이상은 사회 존재 기반, 삶의 배경 없이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뿌리 뽑힌 도시인과 소외된 지식인의 억압된 충동 그리고 감춰진 욕구를 폭로하며 그들의 무의식을 처절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어떤 특정 이념에 기대지 않은 채 단지 자신만의 특이한 시각과 생각에 충실한 ‘글쓰기’는 이상의 모더니스트적 면모와 더불어 시대의 예술 철학에 도전한 천재적 재능을 거침없이 보여 준다. 실험성과 전위성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채로운 비평 담론과 논쟁을 야기하는 이상의 산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현실’에 대한 엄청난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과 ‘산문’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이상의 소설에는 어떤 사건, 행동 혹은 하나의 줄거리조차 없으며, 소설 속 인물들은 말과 행동을 통해 성격(캐릭터)을 구축하기보다는 의식과 사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하나의 잘 짜인 서사 구조, 분명한 개연성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이상의 소설은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무능력한 남편과 살림을 돌보기 위해 낯선 남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날개」,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타락해 가는 인간 군상을 ‘띄어쓰기’ 없는 글쓰기로 묘파해 낸 「지주회시」, 불안하고 성마른, 또 종잡을 수 없는 남녀의 기묘한 관계를 담아낸 「봉별기」와 「실화」, 문학적 동지였던 김유정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김유정」과 우울한 도시인이 들여다본 시골의 정취를 섬세한 언어로 포착한 「산촌여정」, 「권태」에 이르기까지, 이상의 소설과 산문은 독자들의 감수성과 이해력을 쥐락펴락하며 뒤흔들어 놓는다. 이렇듯 이상은 소설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를 두드러지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야기는 해체되고, 줄거리도 뚜렷하지 않다. 소설가이자 산문가로서의 이상은 특정 서술법이나 관점에 기대지 않고 기존 권위도 추종하지 않으며, 가치와 이념에도 반대한다. 그는 단지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 사물에 대한 지각에 충실하다. 바로 이러한 점이 모더니스트 이상의 면모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소설과 산문은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언제나 이 현실이라는 영역을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준비하며 이상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시간과 공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일상과 현실이라는 틀을 파괴한다. 이상 문학에서 시간은 마치 ‘생각의 흐름’처럼 느려지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이동하거나 도약하기도 한다. 이상의 소설과 산문 속에선 일반적인 시간 개념이 뒤집어지고, 주인공의 행동이나 사건 대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념이 이어지며 등장인물의 대화는 모두 생략되거나 간접화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기억과 욕망이 무의식의 세계와 서로 중첩되면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상이 그려 낸 이들이 식민지 근대 한국이라는 위기와 격동의 시대를 살아 내야 했던 소외된 지식인, 뿌리 뽑힌 도시인이자 오늘날 불안정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상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