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하여
국내에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소설이 아닌 추리만화 《소년탐정 김전일》 때문이다. 일본에서 60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김전일(긴다이치 하지메)’은 고등학교 2학년이며 IQ 180을 자랑하는 천재 소년탐정.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 “명탐정이신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라는 대사를 입버릇처럼 외치곤 하는데 이 할아버지란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화 상에서 김전일의 외가 쪽 할아버지가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였던 것. 긴다이치 코스케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 주인공으로 1946년 《혼진 살인사건》에 첫 등장한 이래 장.단편을 포함(아동물 제외) 총 77편의 작품에서 활약했다. 어수룩한 외모와 초라한 차림새, 하지만 뛰어난 추리력의 소유자인 그는 특유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일본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김전일의 할아버지로 거의 50년 전 인물인 긴다이치 코스케를 불러낸 것만 봐도, 또한 이러한 설정이 그토록 환영받은 걸로 미루어 긴다이치 코스케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얼마나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의 참혹한 현실과 마주친 긴다이치 코스케!
스맙(SMAP)의 이나가키 고로 주연, 후지TV 스페셜 드라마 방영
1951년부터 1953년에 걸쳐 잡지 《보석》에 연재했던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팬들이 뽑은 인기투표 3위에 오른 작품이다(작가 자신은 베스트 7위로 선정). 이 작품이 77편에 달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에서도 이토록 유달리 높은 인기를 누린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방탕과 타락으로 가득한 전 귀족 가문에서 일어난 복잡한 3중 살인사건을 명쾌한 추리로 해결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을 첫 손에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외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실제 사건, 전후의 혼란과 귀족 계급의 몰락 등 당대 사회상을 절묘하게 반영해 주로 고루한 인습이 낳은 범죄를 그렸던 기존의 요코미조 작품들과는 다른 신선한 맛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사상 통제로 인해 절필을 강요당했던 요코미조가 패전을 맞아, 이제야 마음놓고 추리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며 환호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모든 게 파괴된 폐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일본인들의 심정이 전부 요코미조와 같지는 않았으리라. 끊어진 교통망과 부족한 물자,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 등 고통은 끝이 없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강력범죄도 기승을 부렸는데, 특히 위생공무원으로 위장한 중년 남자가 전염병 예방약이라며 건넨 청산가리로 12명을 독살하고 현금을 강탈한 '제국은행 사건'은 오늘날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는 전대미문의 '천은당(天銀堂) 사건'은 여기서 착안한 것으로 범행의 얼개가 거의 동일하다. 또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47년은 일본의 화족 제도(메이지 유신의 공신들에게 서양식 작위를 하사한 제도)가 공식 폐지된 해로, 어느 날 갑자기 귀족에서 평민으로 떨어진 화족들의 몰락 역시 작품의 주된 소재로 쓰이고 있다.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으로써 폐쇄된 섬이나 마을, 대저택 등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만을 즐겨 그리던 요코미조가 닫힌 공간에서 벗어나 도쿄라는 열린 공간을 배경으로 선택한 점이나, 안락의자형 탐장에 가까웠던 긴다이치가 조사를 위해 고베로 출장도 가고, 직전에 일어났던 대사건을 끌어들이는 등 도처에 거장의 새로운 시도를 느낄 수 있다. 이 정도 경지에 올랐음에도 늘 도전하는 작가를 어느 독자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