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올해로 작가 생활 40년째를 맞이했다. 작가 조정래가 현대사 3부작 대하소설(<태백산맥><아리랑><한강>)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자전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을 펴냈다.
자전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씌어졌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 250여 명에게서 ‘평소 조정래 선생에게 궁금했던 질문’ 500여 개를 받았고, 이들 질문 가운데 84개 질문을 추려 그에 답하는 형식이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문학 인생 40년이 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꽤 많은 강연을 해왔다. 그때마다 독자들이 아쉬워했던 것이 질문 시간 부족이었다. 어떤 독자들은 편지를 해오지만 거기에 일일이 답장을 쓰기도 어려웠다. 세 편에 걸친 긴 소설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은 많고, 그것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은 늘 미안한 짐으로 남았다. 또 내 마음에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왜 자전 소설은 쓰지 않느냐’. 몇몇 출판사에서 그런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풀 수 있는 책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새 작품을 쓸 일이 바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글을 쓰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중략)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에게 5백여 가지의 질문을 받았다. 겹치는 것을 빼고,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을 간추린 것이 이 책에 수록된 84가지다. 그 84가지 질문은 대충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문학론·작품론·인생론. 그 응답들을 형식을 달리한 나의 자전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사 3부작에 얽힌 비화와 제작 노트
40년 글쓰기 체험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문학론과 창작실기론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크게 문학론·작품론·인생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책의 초반은 40년 글쓰기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론과 창작실기론을 풀어놓았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수많은 인물을 창조해낸 비결까지 그의 소설을 읽고 문학을 꿈꾸는 청년이라면 한번쯤 떠올렸을 질문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
조정래 선생의 현대사 3부작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밝힌 현대사 3부작에 얽힌 비화와 제작 노트를 흥미롭게 읽을 듯하다. 야뇨증이 심하던 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지와의 관계, ‘소년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격려와 도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두 번의 도움’, 소설가 최일남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밝힌’ 박태준 회장의 기부 사실 등은 작가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비화이다. 또 그동안 현대사 3부작에서 독자들이 스쳐 지나갔던 ‘인간 조정래’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작가는 “<태백산맥>의 독자들이 이번 자전 에세이를 읽으면 보물찾기나 퍼즐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태백산맥>에는 작가 조정래의 분신이 들어 있는데, 지금까지 그걸 찾아낸 독자가 몇 안 된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베끼게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태백산맥>을 모두 필사하고 나서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내가 굳이 <태백산맥>을 베끼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는지 직접 체험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태백산맥> 베끼기를 통해 아들과 며느리가 인생이란 스스로 한 발, 한 발 걸어야 하는 천리길이란 것을 깨우쳐주고 싶었다. 인생이란 지치지 않는 줄기찬 노력이 피워내는 꽃이라는 것을 체득시키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성실하게 노력하라’ ‘꾸준하게 노력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태백산맥> 베끼기를 택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베끼기를 다 끝냈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매일 지치지 않고 미련하게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나타내는지 절절히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작가 조정래는 “만일 지금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이번 글이 내 인생을 정리한 유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아들에게도 못한 얘기를 이번에 다 썼다”라고 말했다. 40년 동안 글을 써온 큰 작가의 ‘인생론’이다.
간략한 책 내용 소개·요약
- 승려였던 아버지, 그리고 문학을 접하게 된 사연
아버지는 순천 선암사 승려였고, 시조시인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개편되기 15년쯤 전까지 조종현(趙宗玄)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시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고향 고흥 왕주를 떠나 선암사로 출가했다. 신식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불교계에서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 젊은 승려들에게 신식 교육을 시킬 때였다.
스물넷에 법사가 된 아버지는 전국의 젊은 승려 3백여 명이 일제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만당(卍黨)에 가입했다. 총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었고, 아버지는 만당의 재무위원을 맡았다.
아버지는 선암사에서 결혼을 한 최초의 승려가 되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그 당시 최대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던 불교를 장악해야만 식민통치가 용이해진다는 판단 아래 종교 황국화 정책을 추진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젊은 승려들을 결혼시켜 일본식의 ‘대처승’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제의 은혜로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이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 도리다. 그래서 <아리랑>을 쓴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절 앞에 세 개의 현수막을 걸었다.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해야 한다.’ ‘절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승려들은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주지의 생각은 부주지인 아버지의 생각과 달랐다.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주지의 모함으로 아버지는 경찰서에 잡혀갔다. 세 차례나 죽음 직전까지 끌려갔다가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 아버지를 아끼는 한 유지의 도움으로 순천을 떠나 논산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서당 훈장을 했고, 생계를 위해 5일장이 서는 두 곳 장터로 포목 장사를 하러 다녔다. 장터길을 나설 때는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20리 황토 들길을 걸으며 늘 시조를 읊었다. 시조 공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953년 봄에 벌교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벌교상업고등학교에 국어 선생이 된 것이다. 그 학교 교장이 송광사 출신으로 아버지처럼 신식 공부를 한 덕에 환속을 해 교장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개인 문집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지은 동시와 동요을 본 아버지가 물었다. “이것이 니가 지은 것들이냐? 이리 낱장에 쓰면 되겄냐. 이리 와 앉어라.” 아버지는 반짇고리를 찾아와 실을 꼬고 휴지로 쓰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 이면지를 접어 옛날 책 매는 방식으로 공책을 만들었다. 글짓기를 모아두는 공책을 ‘문집’이라고 한다는 말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시험지의 색깔이 거무스름하고 질이 나빠 걸핏하면 찢어져 사람들이 ‘똥지’라고 하대하는 ‘똥지 문집’에다 동요, 동시를 열심히 지었다. 그렇게 모인 문집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여섯 권이 되었다.
-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의 인물 1천2백여 명. 유일하게 겹친 이름 ‘허진’
소설 속 인물 가운데는 실재 인물이 모델이 된 경우가 몇 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제 외삼촌(박순동. 그분은 김범우와 달리 순천 군정청에 근무했음)이고, 법일 스님이 제 아버지고, 소년 빨치산 조원제가 정치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이다. 그리고 <한강>의 퇴직기자들은 한겨레신문 전 사장인 권근술씨와 그분의 동료들이 간접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 인물의 생김과 언행과 역할에 꼭 어울리도록 이름을 지었다. 독자 인상에 명확하게 밝힌 중요 주인공의 성(姓)까지도 전부 달리했다. 어느 텔레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