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선다는 언론과 방송의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에서는 미국이 새로운 전쟁 상대로 이란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대체 에너지 개발의 새로운 대안으로 다시금 ‘핵 에너지’의 유효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독일 녹색당의 한스 요셉 펠 의원에 의하면 석유는 이미 2006년에 생산이 절정에 다다랐으며, 이후 7%씩 줄어 2030년에는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내다봤다(독일의 에너지 연구기관 에너지워치그룹[EWG] 자료 인용). 구소련 붕괴 이후 갑자기 중앙 유라시아 지역이 러시아, 미국, 중국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가 새로운 자원의 보고로, 특히 석유에 눈독을 들인 열강들이 원조를 무기로 석유를 독점하려하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의 수급에 전 세계적인 비상이 걸렸다. 그 가운데 ‘석유’가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 ‘석유’에 대한 그저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20세기 역사를 ‘석유’의 눈으로 보고 있다. 단순한 역사서도 아니고, 석유에 관한 그저 그런 내용을 담은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난 30년간 석유 지정학 문제를 집요하게 연구해온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이다. 우리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석유’ 문제에 관해 이처럼 집요하고 철저하게,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분석한 책은 없을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포사이트』 등 전 세계 유수의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해왔고, 수많은 국제회의에서 지정학, 경제, 에너지 문제를 다룬 경력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1904년 영국의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의 논문 「역사의 지리적 축」은 ‘지정학’이라는 학문의 태동을 알렸는데, 거의 1세기 후에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자 전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매킨더의 연구와 그의 유라시아 지정학이론을 극구 칭찬했다. 그것이 곧 미국의 드러내지 않은 세계전략을 이끌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지난 1980년대 후반 극적인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처럼 평화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처럼 생각했다. 그것은 공산권의 붕괴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여전히 세계는 대립과 갈등, 전쟁과 빈곤의 연속선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그것이 패권, 특히 지정학적 힘을 영원히 갖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가 아직 관철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고 본다.
20세기의 빚어진 숱한 전쟁들, 즉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 그리고 코소보 사태,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이 바로 ‘석유’ 때문에 비롯되었다. 이란의 팔레비 왕과 호메이니에 의한 정권 교체 역시 미국의 ‘석유정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시아의 금융위기 역시 직간접적으로 ‘석유’와 연관이 있다. 미국은 그저 그런 패권국이 아니라 ‘석유 지정학’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왔으며, 또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중에 있음을 저자는 다양한 자료와 비밀문서를 토대로 밝혀낸다.
‘석유’의 중요성을 최초로 인식한 ‘영국’, 석유 지정학의 태동
20세기 초반, 그것은 분명 ‘영국’의 세기였다. 아니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이끌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것은 영국의 세기임에 틀림없다. 당시 영국의 ‘금’은 세계 신용의 공급원으로서 파운드 스털링화의 역할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 시기 ‘스털링화처럼 좋은’이라는 표현이 곧 영국의 위력을 짐작케한 자명한 관용구였다. 그런 영국에 대적하여 프랑스와 독일은 때때로 손을 잡기도 했고 때로는 적대적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도 단순한 프랑스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 대적하여 협력을 모색하는 두 국가 프랑스와 독일의 사이를 벌려놓기 위해 영국정보부는 치밀하게 이 사건을 이용하였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중동지역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석유 공급을 위해 부설하려던 베를린-바그다드 노선에 대한 영국의 저지에 의한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실질적인 이유가 1914년 8월 전야에 영국 재무성과 대영제국의 재원이 사실상 파산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제4장 참조). 또한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30년 선거에서 겨우 600만 표밖에 얻지 못한 히틀러를 도운 것은 노먼(잉글랜드은행 총재)과 티아크스(잉글랜드은행 이사회 일원)를 비롯한 런던 지지자들의 국제적인 지원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독일이 소련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리라 믿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새로운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영국과 미국은 10여 년 넘게 석유 장악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서로 간에 격렬하게 부딪혔는데, 결국 1928년 ‘현상’(As Is) 협정 또는 아크나카리 협정으로 진정한 석유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세븐 시스터스’(일곱 자매)로 그 구성원은 바로 영미의 7대 메이저 석유회사인 엑슨, 모빌, 걸프, 텍사코, 셰브런, 로열더치셸, 브리티시석유회사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전 세계 석유의 채굴과 정유, 판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는데 이는 곧 은밀한 세계 카르텔 가격을 정하고, 만약 이러한 지배력을 깨뜨리려는 위협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응징을 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른바 석유 재벌과 영미의 금융가가 ‘석유’ 패권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영국과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석유 시장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한 것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제1, 2차 석유파동은 결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들 세븐 시스터스와 영미의 금융가,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고위 정부관료의 작품임은 곧 드러났다.
미국 석유체제의 등장, 브레턴우즈체제와 단일 ‘석유 패권국’
브레턴우즈체제, 그것은 곧 ‘미국의 세기’임을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레턴우즈체제는 세 가지 핵심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국제수지 균형이 위기에 처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준비금을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둘째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위해 회원국 정부에 차관을 공여하는 세계은행(World Bank), 끝으로 ‘자유무역’의 조정된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합리적인 국제기구들이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영국과 미국을 위한 것들이었다. 특히 미국을 위한. 즉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내에서 실질적인 표결 통제권은 영국과 미국에 주어졌으며, 브레턴우즈체제는 근본적으로 ‘금본위제’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회원국의 통화가 달러화와 연동됨으로써 세계의 가장 강력한 통화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자국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전략적 이익을 통제하는 영국의 노선을 본받아 20세기 중후반 실질적인 패권국이 되었다.
브레턴우즈체제의 출범이 갖는 의미는 ‘미국’이 ‘석유’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주체제를 형성했다는 데 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최근의 이라크 전쟁이 보여주듯이 미국은 이라크에 후세인을 몰아내고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중동의 풍부한 ‘석유’ 때문이었다.
대표적 사례를 들어보자. 1950년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마테이가 석유와 개발에 독립을 시도하여 적극적인 산유국 정책과 에너지 확보(이란과 소련으로부터의 석유 도입 추진)에 나서자, 세븐 시스터스는 긴장하였다. 결국 1962년 10월 27일 마테이를 태운 비행기가 시칠리아를 이륙하여 밀라노를 향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로마 주재 미국 중앙정보국 책임자 토머스 카라메신스는 그 이후 아무런 해명없이 로마를 떠났다. 후에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