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잇습니다――쇠도 글도 삶도!
할말을 잃어서 할말이 너무도 많은
지방×청년×용접 노동자 천현우의 뜨거운 출사표
지방, 청년, 그리고 용접 노동자. 여태껏 우리가 아는 척해왔거나 모르는 척해온 세계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작가가 도착했다. 정상 사회의 바깥, 차라리 무법지대에 가까운 인간소외의 장,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라 믿어지지 않는 노동의 현장에서 탄생한 작가 천현우. 그는 우리 사회의 사각에서, 사양하는 산업과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주간경향』에 ‘쇳밥일지’와 ‘쇳밥이웃’을 연재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첫 책 『쇳밥일지』는 연재분에 전사를 더하고 이를 전면 개고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2022년 봄까지를 담아낸 『쇳밥일지』는 한 개인의 내밀한 역사가 시대와 세대의 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를 떠오르게 하고, 노동자 계급에 관한 생생한 밀착 일지라는 점에서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그 궤를 같이한다. 양승훈 교수의 추천사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지방 제조업 도시의 ‘너무한’ 사연을 담은 문화 기술지이자, 부당함과 우여곡절 속에서 ‘쇳밥’을 먹으며 성장한 청년 용접 노동자의 ‘일지’”이다. 세대론을 논할 때조차 소외되는 ‘4년제 대학 출신-수도권 거주자’가 아닌 한 용접공의 “생각보다는 힘들되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을, “고와 낙이 있었고, 땀과 눈물이 있었으며,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고, 꿈이 짓이겨졌다가 다시금 피어”(「프롤로그」에서)나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담았다.
불꽃 튀는 촉으로 써내려간 ‘너무한’ 나날의 기록
엄연하고도 어엿하게 존재하는 청년 노동자들의 비망록
작가는 가난이 싫어 얼른 취업하려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이후 하청업체를 전전하며 최저 시급 언저리만 맴도는 악순환의 굴레에 갇혀버린다. 주야 교대 근무에 저당잡힌 피폐한 일상은 쉬이 변하지 않고, 각종 편법으로 점철된 근로 조건과 언제든 타인으로 대체 가능한 업무는 몸과 마음을 모두 갉아먹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청춘’을 즐기고 있는 듯하지만, 청춘이란 단어조차 자격지심에 가려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듯 느껴지고, 공장 바깥에서는 ‘못 배운 놈’으로 괄시받고, 공장 안에서는 산재를 당해도 찍소리 할 수 없다. “노동강도 생각하면 코웃음 나게 적었지만 내 삶을 뒤바꿔놓기엔 충분”한 첫 월급을 받으며 삶이 가까스로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을 기뻐하지만, 그 뒤바뀐 삶의 세목이 “전화 요금 내고, 밀린 집세를 내고, 끊긴 인터넷도 복구”(45쪽)하는 것일 때, 우리는 아연할 수밖에 없다.
또 기계처럼 일했고 공장에서 열두 시간을 보냈다. 힘들진 않았다. 다만 허무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영화 한 편이나 애니메이션 네 편 보면 또 회사. 맘놓고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하루. 그나마도 야간에서 주간 전환 시엔 반나절 남짓. 이 굴레 안에 청춘을 계속 가두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_47쪽
평생 땜질해서는 ‘사람 구실’ 못하리라는 근심어린 동료의 조언, ‘인서울’에 성공한 한 친구의 ‘고작 전문대 나와서 대기업을 갈 수 있느냐’는 비아냥을 들은 끝에 작가는 편입을 도모하지만, 그마저 어머니가 사기를 당해 빚더미를 안으며 좌절되고 만다. 도무지 월급만으로 빚을 갚을 수 없어 주말 막노동을 나가던 어느 날, 인생의 은인-멘토를 만난다. 조경 일당직의 사수 ‘포터 아저씨’는 용접의 세계를 소개해주는 것은 물론, 편입 실패와 학벌 콤플렉스에 빠져 자신의 초라함만 되새길 뿐이던 작가에게 오히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기죽지 마”(116쪽)라는 말을 건네며 육체노동자의 자부심을 일깨워준다.
‘용접’은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세상에 알려져 있다. 나 역시 달리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 태양만큼 눈 따가운 빛이 아른대고 사방으로 벌건 불똥이 튀어대는 위험한 일로 치부했다. 처음으로 용접면을 쓴 순간, 내 짧은 인식이 얼마나 큰 편견덩어리였는지 깨달았다. 온통 어두운 시야 속, 번뜩이는 불꽃만 남은 망망대해 위에서 치열하며 섬세한 손놀림이 8자를 그리며 흐느적댄다. 천천히 진군하는 용융 풀은 나긋하게 산책 나온 주홍 반딧불이 같다. 목적지에 도달한 불길이 사그라지고, 지나왔던 길엔 위아래 간격이 똑바른 용접 비드만 남아 철판과 철판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_115쪽
“누가 중소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
‘배워두면 어디서든 도움이 된다’는, ‘돈은 안 돼도 손맛은 죽인’다는 소리에 피가 끓어 본격적으로 용접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근사한 ‘장이’의 삶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현실엔 하청 직원의 서러움과 재해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정직원-노조원과의 차별, 산재를 입어 영구 장애를 얻은 동료, 외국인 노동자 혐오는 할말을 잃게 만든다. 경력이 쌓여도 어김없이 최저 시급으로 시작하는 용접 판과 채 1할도 갚지 못한 빚 앞에서, 우연히 다가든 사랑조차 ‘주제 파악’이란 체념 속에 좌절될 뿐이다.
이 회사는 잔업 근무자를 위한 통근 버스 따윈 없다. 휴게실도 샤워실도 열어주지 않는다. 땀에 찌든 옷을 입은 채 걸레짝이 된 몸으로 버스에 오른다. (…)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 따윈 느낄 새도 없다. 버스 안 모든 승객이 기름내와 용접 ‘흄fume’ 냄새 풍기는 나를 불쾌하게 여길 것 같아 불안하다. 이 인 좌석 구석에 쪼그려앉아 머리를 기대는 동안, 만원 버스임에도 누구도 옆에 앉지 않는 현실에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 세상은 그저 냉소로 회답한다. 넌 흙수저 주제에 노력도 하지 않았잖아?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_148쪽
그러나 소설가를 꿈꾸던 ‘초원씨’와 만나고 헤어지고, 단련의 계기가 된 타지생활을 보내며 작가는 내면을 망치질하기 위해 독서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정치 팟캐스트와 행동경제학은 시야를 넓히는 기반이 되어준다. 이후 순탄한 회사생활을 유지하며 운동, 독서, 글쓰기가 일상에 편입된 어느 날, 또 한번의 끔찍한 산재를 목격한다. 다만, 예전처럼 쉽게 무너지거나 게임으로 시름을 잊거나 자신을 방치하며 분노하고 냉소하고 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금 현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작가는 가슴속에 그리고 노트 속에 촘촘히 이 모두를 새겨넣는다. 겹겹이 글을 쓰게 하는 현실 속에서 쓸 수밖에 없는 간절함 속에서.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꿈의 천장을 내려앉히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존감을 찌그러뜨리는 압력에 부단히 저항하며 글을 써온 작가는 SNS를 뜨겁게 달군 용접공 비하 발언에 대한 답글과, 양승훈 교수와의 지방 공장 노동에 관한 대담을 통해 차츰 공론의 장에 발을 들여놓는다. “2030 공장 노동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왜 절망과 냉소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지방에서 수십 년 커오며 답안지처럼 생각해왔던 평범한 삶이 (…) 이젠 전혀 평범하지 않으며 심지어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란 걸 깨달았을 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세계가 붕괴하고 갈피를 잃은 그 낭패감을 전달”(225쪽)하는 그의 글은 이후 지역과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공장 안에서 지겹고 식상해질 때까지 나눴던 말이, 밖에선 부끄러워서 감히 꺼내지도 못했던 이야기”(228쪽)에 드디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먹고살기’ 위한 삶에서 죽살이치다,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한 삶을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