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느냐 죽느냐, 궁극의 선택! 센고쿠 시대 통설부터 최신 연구까지 날카롭게 파헤친다 일본의 센고쿠(전국) 시대는 각지에서 여러 군웅이 일어나 세력을 다투는 전란의 시대였다. 이 혼란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룬 것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위시한 그의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어 천하를 놓고 다시 다투게 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여 일본은 에도 시대로 접어들 준비를 마친다. 일본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이 시대에 사무라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때로는 한순간의 방황이 일가의 멸망을 초래했고,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가문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천하를 판가름한 결전, 세키가하라 전투를 중심으로 생존을 건 전국 무장들의 명암을 풀어낸다. 통설뿐 아니라 최신 연구 성과까지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딱딱해지기 쉬운 역사 연구의 최전선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는다. 양자택일: 도요토미인가, 도쿠가와인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는 무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도요토미가의 유력한 가신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내내 애매한 태도를 보이다가 끝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섰다. 그래서 히데아키를 배신자라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남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입지가 위태로워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군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봐야 옳다. 히데아키의 이런 배경은 곧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경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는 최강의 두 세력이었고 무장 영주들은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영주들은 대부분 세력을 키우지 못했으며 서군을 택한 영주들은 몰살 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배신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렇게 영주들에게 가문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결단을 강요했다. 결단을 내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하루 전에 서군의 세 요충지 중 하나인 마쓰오산성을 점거했다. 이에 따라 동군과 서군이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비로소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아키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한 나비효과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큰아들의 정예군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투를 치른 것이 그 증거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가 바꿔버린 대치 구도에서 반짝이는 승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선택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도쿠가와가와 우에스기 가의 신경전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었다. ‘군신’ 우에스기 겐신으로 유명한 우에스기가는 도쿠가와가의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를 불렸고, 이를 문제 삼는 도쿠가와가를 우에스기가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가 조롱했다(나오에조 사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가를 토벌하러 오사카성을 떠났는데, 그 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거병했다. 그런데 우에스기가는 회군하는 이에야스군을 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천하 통일’을 꿈꾸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은 ‘비상식적’인 인물이었고, 오랜 전란으로 인해 많은 영주는 ‘군웅할거’ 상태를 당연시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천하 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한판 승부였다면, 세키가하라에서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해 군웅할거 시대가 돌아올 거라고 믿는 다른 영주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에스기가는 군웅할거의 재래를 전제하고 미리 입지를 세우기 위해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기보다 근처에서 패권을 잡으려는 행보를 보였다. 센고쿠 시대 참모로 잘 알려져 있는 구로다 간베(조스이)도 마찬가지로 세키가하라에서 동군과 서군이 맞붙는 동안 규슈 지역에서 영지 확대를 꾀했다. 사쓰마를 지배하던 시마즈가가 서군에 1500명의 군사만 보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형식상으로’ 은거하던 시마즈가는 돌아올 군웅할거 시대를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으며 군웅할거를 노리던 영주들은 새 권력 구도로 편입되었다. 도쿠가와의 논공행상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업적과 전력을 내세워 천황도 배제한 채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의 새 중심으로 에도를 택한 것도 더 이상 천황의 조력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제패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했던 무장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가장 큰 포상을 받은 건 영지가 40만 석이나 늘어난 구로다 나가마사였다. 구로다 간베의 아들이었던 그는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과 내통해 모리가의 군대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탈시켰다. 모리가는 전후 지위 보장을 약속받았으나 변심한 이에야스에 의해 세력이 축소되었다. 우에스기가는 앞서 말했듯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세력을 늘리려 했으나, 전투의 결과를 전해듣자 흐름을 오판했다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이에야스는 그 태도가 담백하다며 우에스기가를 멸문시키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일본 무쌍의 용장’이라며 추켜세웠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서군 편에 섰다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 노력하여 몰수된 영지를 회복하고 2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가깝게 지냈다.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에야스는 전반적으로 인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랫동안 도쿠가와가를 섬긴 가신들에게는 더욱 인색했고,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다가 전향한 가신들 등 도쿠가와가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신흥 가신과 사위들에게 굉장히 후한 포상을 내렸다. 특히 이에야스의 사위가 된 가토 기요마사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큰 공적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지가 약 25만 석이나 늘어났다. 이에야스의 둘째, 셋째 딸과 결혼한 신흥 영주 이케다 데루마사, 가모 히데유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압도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영주들 간의 세력 구도를 재편했고, 일본은 도쿠가와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키가하라 전투의 큰 흐름을 설명한 것 외에도, 이 책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가득하다. 매력적인 인물 구로다 간베, 서군을 일으키는 데 실질적으로 공헌한 오타니 요시쓰구의 일화도 있고 만화 『나루토』 에서 오마주한 다치바나 소세쓰의 ‘라이키리’ 전설도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다치바나 긴치요 등의 여성 성주 이야기, 『오야무 이야기』 『오키쿠 이야기』 등 당시의 평범한 여성들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