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성인은 누구인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개신교 신자나 다른 종교인들과는 달리 무수히 많은 성인들을 가지고 있다. 공식적인 성인 명단은 교황청에도 없어서 성인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르지만, 대략 1만 명에서 2만 명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인들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주보성인이나 영명 축일에 생각하는 정도랄까. 그리고 무슨 급박한 상황에서 기적이라도 바라며 간구하는 정도다. 그래서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저자도 그랬었다.
진이 잔 다르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음을 시인했다. 그러자 무슈 셰르망이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언급한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는 음성을 들은 (누구의 음성이었더라?) 젊은 처녀로서 (얼마나 젊었더라?) 프랑스 군대를 승리로 이끌고 (누구와 싸워 승리했더라?) 화형을 당한 뒤 (정확히 무슨 이유였더라?) 성인으로 선포된 (언제 선포되었더라?) 인물이었다.
- ‘하느님의 아이’, 잔 다르크(29쪽)
의견과 조언, 협조와 위안을 주는
형이나 누나 같은 멘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성인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저자는 예수회 수련자가 되면서 독서를 통해서 혹은 어떤 계기가 있어서 성인들을 한 분 한 분 알아갔다. 그리고 성인들의 생애나 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자신과 공통점을 확인하며 친밀감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성인들이 자신과 늘 함께하면서 의견과 조언과 도움을 주는 형이나 누나 같은 멘토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나이로비에서 삶이 힘들 때마다 (그럴 때가 잦았다) 나도 모르게 알로이시오를 생각했다. 아침에 갑자기 물이 없어 당황할 때, 나는 조용히 알로이시오 성인에게 작은 기도를 바치며 주선을 부탁드렸다. 내가 모는 낡은 지프가 (또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을 때, 나는 알로이시오 성인에게 조금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밤도둑이 우리 공동체에 숨어들어 내 신발과 카메라와 몇 푼의 현금을 훔쳐 갔을 때, 나는 가느다란 갈대 같은 내 참을성을 놓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알로이시오 성인에게 부탁드렸다. 그리고 단핵세포증으로 두 달 동안 침상에 누워서 내가 지금 케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워졌을 때, 나는 그에게 전구와 격려를 구했다. 나는 그가 병듦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알로이시오 곤자가(517쪽)
성인들은 누구나 이런저런 고통을 겪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비슷한 시련을 겪을 때 이미 그런 고초를 당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 성인들이 하느님과 하나 된 상태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위안을 얻는다.
예를 들어 리지외의 데레사와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짧은 생애 동안 중병에 시달렸고, 긴 생애를 살았던 페드로 아루페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병 때문에 낙담하게 될 때 스스로 낙담했음을 시인한 데레사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굳센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베르나데트나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자 했던 페드로 아루페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성인들의 삶을 알면 그들의 지혜를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다. 경험 많은 여행자처럼, 성인은 고통의 길을 걷는 그대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다. 성인들의 생애를 읽는 이유는 그들의 통찰력에서 유익한 도움을 얻는 데 있다.
- ‘다른 형태의 성스러움’, 결론(573쪽)
그러다 보니 저자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인들에 대한 애정을 당혹스럽게 여기던 사람에서 놀랍게도 성인들을 자기 삶의 기쁨 중 하나로 여기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그 후로도 성인들에 관해 읽고 새로운 성인과 만날 때마다 각별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 어떤 성인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 성인이 이미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다른 성인을 놓아두고 한 성인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상으로는 우리의 삶과 공통점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세기 전에 죽은 누군가가 도움을 구하고 싶을 만큼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16세기 후작의 아들을 자주 찾게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면에서 한 성인에 대한 끌림 또는 신심은, 남용되고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신심들은 있는 그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놀라움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자, 영성 생활에 예기치 못한 은총으로서.
-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알로이시오 곤자가(526쪽)
나는 또한 그들의 우정도 감지한다. 나는 성인들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과의 삶을 즐기는 이들이 나를 돕고 있고, 그들은 나의 편이고,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훌륭히 살아 내기 바라고 있으며, 그들은 내가 훌륭한 예수회원이요 사제가 되기 바라고 있다고 느낀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을 처음 대면한 이래로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들은 내게 말한다. “포기하지 마라.” 그들은 내게 타이른다. “걱정하지 마라.” 또는 노리치의 율리아나처럼 이렇게 말한다.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
- ‘다른 형태의 성스러움’, 결론(576쪽)
성인과 관계 맺는 두 가지 방법:
수호자형과 동반자형
저자는 우리가 성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방식이 ‘수호자’형과 ‘동반자’형이 있음을 예리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을 수호자로만 여기지 동반자로 여기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수호자’형이란, 성인들이 하느님 가까이 있고 성인들에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분들에게 그저 도움을 청하기만 하는 관계다. 마치 나를 위해 부모님께 말씀드려 달라고 형이나 누나에게 늘 부탁만 하는 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초대교회에서는 성인들이 ‘수호자’라기보다는 ‘동반자’에 더 가까움을 일깨워 준다. 그러니까 성화와 성인의 지위가 보다 평등했고, 친구 같은 관계였다. 그러한 예로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를 ‘성인’이라 지칭했음을 들 수 있다.(우리말 성경에서 ‘성도’라 옮겨서 책의 본문에도 ‘성도’라고 옮겼지만, 그리스어 원문은 ‘성인’이라는 뜻의 하기오스 a`gioj를 썼다.-편집자 주) 즉 성인들은 우리보다 앞서 가며 우리를 격려하는 친구이자 신앙 공동체의 형제자매이며 동시에 거대한 ‘증거자 집단’인 것이다.
나는 이들 가운데 몇 분이 여러분에게도 동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결합하는 날, 우리의 귀감이자 중개자요 벗이 되어 준 이 성인들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것이다.
- ‘다른 형태의 성스러움’, 결론(600쪽)
저자는 자신의 삶에서 성인들이 이 두 가지 유형이 모두 효험을 발휘했다며, 우리에게 성인들을 이러한 멘토로서 사귀는 법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감동적으로 전해 준다.
내 삶에서는 두 가지 유형이 모두 효험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성인들을 동반자로, 귀감으로, 그리고 물론 응원단장으로 삼는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때도 많고, 그럴 때 내가 얼굴을 향하는 이들이 성인이다.
예를 들어 리지외의 데레사는 내가 낙담하거나 풀이 죽었다고 느낄 때 생각나는 성인이다. 그녀는 은총이 일상생활의 노고를 통해 작용한다는 점을 깊이 깨친 사람으로, 그녀의 표양은 그날 내 앞에 놓인 일을 보다 평온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그날의 근심 걱정이 나를 짓누른다고 느끼면 데레사 성녀에게 기도를 부탁드린다.(……) 성소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