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다. 다르다고 느끼는 자신이 너무 외로웠다.
그녀는 과연 무엇에 반발하고 저항하려 했던가?
그 시절 그녀는 사내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자기 몸을 애통해하면서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 불쌍하고 가장 버림받은 몸이여!"
▣ 1928년 출간 즉시 풍기 문란을 이유로 금서 처분을 당했던 20세기의 문제작.
버지니아 울프, D. H. 로렌스에 버금가는 영국의 소설가 래드클리프 홀의 작품 국내 첫 완역 소개.
현대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자 ‘사랑과 고독’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슬프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낸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이 펭귄클래식 코리아에서 출간되었다. 작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박해와 오해에 시달리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라 밝힌 <고독의 우물>은 실제 남장을 하고 성적 소수자의 운명으로 살았던 래드클리프 홀의 자전적인 작품일 뿐 아니라, 출간 즉시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되고 수년에 걸친 법적 분쟁으로 오스카 와일드, D. H. 로렌스와 함께 문학사상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재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적인 묘사라고는 키스가 고작인 이 (‘풍기 문란한’) 작품은 게이/ 레즈비언, 동성애 문학이라는 좁은 영역을 벗어나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의 고뇌와 외로움, 고통과 절망이 잘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비블리오테라피’(문학치료)의 일환으로 활용되는 작품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비타 색빌웨스트의 <암흑의 섬>, 리타 메이 브라운의 <루비프루트 정글> 등과 함께 기성 사회와 과감하게 맞선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평생 남성으로 살기를 소망했던 한 여인과 어린 소녀 사이의 이 강렬하고 진지한 사랑 이야기는 영국에서 출간 직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선데이 익스프레스》의 편집장 제임스 더글라스는 “나는 우리의 건강한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게 하느니 차라리 독약이 든 약병을 건네겠다.”라는 역사에 남을 혹평을 할 정도였다. 결국 런던 시장 차터스 바이런 경은 품위 있고 절제된 작품이기는 하나 ‘점잖은 사람들’에게 동성애를 인정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겐 잘못이 없음을 이해하라고 호소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이 책을 ‘외설’ 서적으로 단정하고 모든 책을 회수해 폐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에서는 동성애를 다루는 것 자체가 외설이 될 수는 없다는 상반된 판결이 내려졌고, 그와 함께 1928년 출간된 <고독의 우물>은 출간 해에만 2만 부가 팔렸고 총 1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으며, 최소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영국에서는 홀이 죽은 뒤 상소심을 통해 1949년에 가서야 출판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홀은 미국 법원의 평결로 정당함을 인정받았으나, <고독의 우물> 이후 두 번 다시 문제작을 쓰지 않았다.
▣ 자신에 대한 절망을 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소외받는 성적 소수자들의 고독하고 절박한 사랑 이야기.
<고독의 우물>은 최초로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전면으로 내세운 ‘레즈비언 소설의 원형’이라 불리지만 “제목에서부터 마지막 책장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타임스》) 고독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표시를 해주었다.”는 성경의 문구를 자기 자신의 몸에 대입시켜 평생 ‘도착자(倒錯者)’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어루만지며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또래의 ‘정상적인’ 친구들로부터 언제나 버림받는 외로운 존재다.
외로웠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자신이 너무 외로웠다. 그처럼 외롭다는 것이 끔찍했다. 한때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오히려 즐기기조차 했다. 어린 넬슨과 같은 옷차림을 좋아했던 것처럼, 그런 차이를 즐겼다. 그런데 정말 그것을 즐겼던가? 아니면 부적절하고 유치한 반발의 한 형태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가장무도를 하면서 집 안을 활보할 때 그녀는 과연 무엇에 반발하고 저항하려 했던가? 그 시절 그녀는 사내아이가 되고 싶었다. - 본문 1권, p. 171
이 세계에서 구걸하는 자. 작품 속의 인물은 스스로를 이렇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고.
어쨌든 적어도 야릇하게 보일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춤출 수는 있었잖아요.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거죠. 이 세계에서 구걸하는 자가 선택자의 입장에 설 수는 없잖아요. -본문 2권, p. 319
따라서 그들은 같은 성향을 가진 그들끼리 뭉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어둠의 세계 속에 그들만의 천국이자 그들만의 지옥을 만들어간다. 그들 사이의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절실한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그려진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사랑이고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는 고독과 외로움이지만 ‘그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해야 하고, 더 고독해야 하고, 더 아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현재의 우리들은 그들만의 깊고 깊은 고독의 우물을, 그리고 우리 모든 존재가 지고 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동성애자들로부터는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삶을 ‘한낮’으로 끌어냈다는 데,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위로했다는 데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작품 속에 드러나는 레즈비언들의 삶을 가난, 약물 중독, 우울증, 자살 등 지나치게 비참하고 슬프게만 그림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동정을 ‘구걸’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한 번도 여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여성성 자체 혹은 (작품 초반) 도착자들 모두를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주인공의 비극적이고 불가능한 사랑은 오히려 남성성과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의 또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일 뿐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레즈비어니즘의 구현’이냐 ‘반(反)레즈비어니즘의 전형’ 또는 ‘트렌스젠더 서사’냐 등을 두고 여전히 많은 논쟁들이 오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작품이 동성애가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소비되는 현대사회에서 가지는 현재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품 속 사랑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를, 그들의 사랑도 남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절규하는 작가의 목소리에는 반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 죽음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사랑의 시작과 끝, 그 황홀하고도 끔찍한 파괴력.
스티븐 고든.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임신 기간 내내 아들이라 철석같이 믿고 태중의 아기에게 스티븐이라는 남자의 이름을 미리 붙여 두었던 고든 부부는 태어난 아이가 딸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고수한다. 아빠를 쏙 빼닮은 이 아이는 이름처럼 사내아이 같기만 하다. 치마와 인형을 싫어하고 운동으로 근육 키우기가 취미이며, 남자들처럼 말을 똑바로 앉아 타고 사냥 대회에 나가는 데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운동신경이 더 뛰어나다. 게다가 이 아이는 우정은 남자들에게, 사랑은 여자들에게 느낀다. 그녀의 첫사랑은 바로 하녀 콜린스. 잦은 바닥 청소로 무릎 염증을 앓는 하녀를 대신해 자신이 그 병을 앓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순진하고도 엉뚱한 소녀이다. 하지만 콜린스가 집안의 풋맨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후 인생 첫 번째의 절망을 경험한 그녀는 조금씩 자신이 남들과 뭔가 다르다는 점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 필립 경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스티븐에게 알리는 대신 그녀를 이 사회에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전문적인 커리어를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