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국의 전통 음악이 아름다운 건 우리 음악이라서가 아니다. 우리 음악은 기교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게 정돈되었을 때 연주해야 하는 음악, 즉 바로 마음으로 연주해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KBS와 국악방송에서 우리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송지원 교수가 소개하는 우리 음악의 거장 52인. 그들에게서 진정한 음악인의 자세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들어보자.
우리 전통 음악을 기록한 우리식 악보가 존재한다? 늘 서양식 악보만 접한 탓에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당신들의 음악을 ≪현학금보(玄鶴琴譜)≫(p20),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p31), ≪졸장만록(拙庄漫錄)≫(p41) 등에 기록하여 대를 이어 연주하였다. 이런 악보들의 존재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국악 사랑을 논한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 독서와 음주, 토론이 삶의 낙이었을 듯한 선비들이 오불탄(五不彈)과 오능(五能)이라는 엄격한 조건하에 거문고를 탄주하며 정신세계를 가다듬었다는 사실을 접하니, 학문과 음악을 이분법적으로 여긴 것이 우리 시대의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거문고를 대하는 선비의 자세, 오불탄과 오능
판중추부사 겸 태학사 오재순의 아들이자, 촉망받는 학자 오윤상의 동생인 오의상(1763~1833)은 벼슬을 거부하고 ‘삶의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였다.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여 병까지 났던 그는 당대의 선비들이 그러했듯 거문고를 탄주하며 잡생각을 지우곤 했는데, 그 실력도 뛰어나 명인으로 도 알려졌다. 오의상은 오불탄이라 하여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았고, 오능이라 하여 다섯 가지 자세를 갖추고 연주에 임했다고 하니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p17).
첫째,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심하게 내릴 때는 연주하지 않는다.
둘째, 속된 사람을 대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셋째, 저잣거리에서 연주하지 않는다.
넷째, 앉은 자세가 적당치 못할 때 연주하지 않는다.
다섯째,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 연주하지 않는다.
_ 오불탄(五不彈)
첫째, 앉는 자세를 안정감 있게 한다.
둘째, 시선은 한곳을 향하도록 한다.
셋째, 생각은 한가롭게 한다.
넷째, 정신은 맑게 유지하도록 한다.
다섯째, 지법(指法)은 견고히 하도록 한다.
_ 오능(五能)
모든 선비가 지켜야 했던 이러한 오불탄과 오능은 거문고가 정신세계를 다듬는 데 쓰이는 ‘악기 이상의 악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철저히 지킨 오의상의 연주는 청자의 마음을 훤히 트이게 하면서 정신을 맑게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선생은 거문고로 연주하지 않고 마음으로 연주하며, 소리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맞추시는 분이다”라고 평하기까지 했다.
오의상은 자신의 이런 음악 철학을 세상에 알리고 대대로 전하기 위해 ≪현학금보≫를 만들어 기술적으로 선율을 구분하여 연주하는 기교적인 ‘손가락 끝의 음악’보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화려한 무대 설비와 특수한 소도구에 의한 연출, 요란한 춤사위, 가수나 연주자의 외모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음악인들이 새겨들을 명언이다.
조선시대에도 가수의 ‘외모’가 중시되었음의 증거, 남학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가수가 가창력보다 외모로 평가되는 세태를 꼬집는다(p210). 그러나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가창력보다 외모로 가수를 평가했는데, 그 주된 예가 이옥(1760~1812)의 문집에 나오는 가수 남학(南鶴)이다.
이옥의 글에 따르면 남학은 최악의 외모를 타고난 가수였다. 난쟁이의 몸, 사자의 코, 늙은 양의 수염, 미친개의 눈, 닭발 같은 손을 지닌 덕에 남학이 모습을 보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놀라 울며 넘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이었다면 오디오형 가수가 되었을 듯”(p211)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바, 그의 노래는 화창한 날에 꾀꼬리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아름다웠고, 처마 끝에 달린 유리로 된 풍경이 울리는 소리처럼 영롱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 목소리를 잘 낸 덕에 친구의 부탁으로 여장을 하고 어두운 기생방에 들어앉아 노래를 부르니, 그 목소리만 듣고 기생들이 친자매처럼 다정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남학의 얼굴을 본 뒤에는 모두 비명을 지르거나 그 자리에 서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남학에게서 전해 듣고 많은 이가 웃었다지만, 당사자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우리는 가끔 목소리만 듣고 상대의 외모를 상상할 때가 있다. 목소리와 상상한 외모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간혹 실망하기도 한다. 외국 영화를 더빙할 때 아름다운 여주인공, 잘생긴 남주인공은 으레 멋진 목소리를 내는 성우의 몫이 된다. 사실은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얼굴이 잘생겨도 목소리는 좋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의 선입관은 어김없이 좋은 목소리는 잘생긴 외모와 일치시킨다. 그런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조선 후기 남학이라는 가수의 외모를 보고 누가 그런 고운 목소리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남학이 끝내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얼굴 없는 가수’로만 남아 있었다면 이옥의 글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그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졌을까? _p.215
만파식적의 재료가 된 명품 대나무, 쌍골죽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신라 신문왕 대(?~692) 감은사 근처 동해의 작은 섬에 대나무가 있었다. 그 대나무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된다는 보고를 받은 왕이 일관(日官)에게 그 일에 대해 묻자,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넋과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를 안정시킨 김유신 장군의 넋이 깃든 것”이라면서, 그것으로 저(笛)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하리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라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이 괴이한 설화는 “진골계 왕의 권위를 확립하려고 만들어냈을 이야기”이며, 오늘날 대금으로 불리는 악기의 조상인 만파식적의 원료 쌍골죽(雙骨竹)을 소개한다.
살이 두꺼워서 악기의 내경(內徑)을 고르게 만들 수 있고, 나무가 단단해서 잘 터지지도 않으며 소리도 야무진 쌍골죽은 일종의 병죽(病竹)으로 대나무의 외경 양쪽에 골이 패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려 2만 그루의 대나무 중에서 한 그루 나올까 말까하며 3년 이상 된 것을 최고로 치기에 쌍골죽을 채취하는 이들은 심마니들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대숲에 들어간다고 한다. 채취한 뒤에도 불을 골고루 쬐어 진을 빼고 석 달 동안 음지에서 말린 뒤, 소금물에 한 달 동안 담갔다가 건조하는데(p147),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던 장인들의 정성이 떠오른다. 그 뒤 밀초 작업과 청 작업을 거쳐 완성되는 대금은 자연의 원성(元聲)을 담고 있으니, 유유자적함을 즐기고 넉넉한 정신세계와 만백성을 위한 태평성대를 추구했던 진정한 선비들이 사랑했을 만하다.
조선총독부도 알아서 모신 대금의 신선, 김계선
“대금처럼 만인(萬人)을 즐겁게 하는 악기는 속이 비어 있소!”라는 명언으로 자신의 궁핍함을 달게 받아들인 예술가가 있었다. 실학자 지봉 이수광의 5대손 이덕주(1695~1751)가 「민득량전(閔得亮傳)」으로 소개한 가야금의 달인 민득량에게 스승이 처음 해준 말도 “가야금을 배우려면 장가부터 들라”(p52)였을 정도로 예술가의 삶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던 경성 방송국마저 그를 위한 고정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니 그 실력은 물론 삶도 궁금하다.
구한말에 태어나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김계선(1891~1943)은 부친 친구의 권유로 당시 내영(內營)의 취악대인 겸내취(兼內吹)가 되면서 악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마침 고종 대의 대금 명인 최학봉의 문하에 들 수 있었던 그는 끊임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