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쓰루의 고전적인 읽기 방식.
지식의 양이 아닌 배움의 자세가 사유의 질을 결정한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철학, 그중에서도 타자론과 윤리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우치다 다쓰루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레비나스 해설서’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바와 달리 곧바로 레비나스의 이론을 소개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레비나스와 라캉이 (일본어 원작의 부제는 ‘라캉에 의한 레비나스’이다) 얼마나 난해하게 글을 쓴 학자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이 텍스트를 매우 어렵게 쓴 것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라는 질문을 던지게 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 독해의 가장 원초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수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쓴 레비나스론을 읽어도 아마도 여러분에게 “아하 그렇군. 그런 거였어. 이제야 레비나스를 알겠다”라며 무릎을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레비나스를 직접 읽지 않고도 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은 제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레비나스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조술하는 것은 이것을 읽은 여러분으로부터 “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레비나스에 대한 결착을 맺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야기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고 “뭔가 점점 더 모르겠다”라며 머리를 부여잡고는 “자 그렇다면 내가 직접 레비나스를 읽을 수밖에 없겠군” 하고 결심하는 독자를 한 명이라도 늘리고 싶어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치다 다쓰루는 해설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글을 쓰고 있는 것과도 같다. 즉, 통상적으로 해설서에 기대하는 바, 명쾌하게 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그 충실한 역할을 저버리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 식으로 글을 서술하는 것일까? 해설에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고, ‘이렇게 이해하면 정말 쉽다’는 식의 서술 또한 저버리고, 오히려 레비나스와 라캉은 정말 난해하다는 당황스러운 서술을 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레비나스를 명쾌하게 설명해 줄 생각도 없다니. 해설서로서는 황당무계한 도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우치다 다쓰루의 이러한 설명은 오히려 철학함의 가장 기본과 기초로 우리를 돌려놓고자 하는 의도에 있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의 ‘이론’은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고 무엇이 레비나스를 올바로 이해하는지 그 ‘태도’에 대해 쓰고 있다. 그 설명은 책의 도입부의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책의 마침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말하자면 레비나스 이론에 대한 설명이 레비나스를 올바로 이해하게 하지 않고, 레비나스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태도가 레비나스를 깊이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치다 다쓰루가 해설하는 것은 레비나스 해석이 아니라 레비나스를 독해하는 방법에 대한 해설에 가깝다. 다만 우치다 다쓰루 특유의 명쾌한 설명 방식으로 레비나스 독해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우치다 다쓰루는 위의 인용문의 직후에 다음과 같이 추가한다.
“이 책을 읽은 후, 실제로 레비나스 책을 들고 저와는 전혀 다른 읽기를 하는 독자(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독창적인 레비나스론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독자가 한국에도 등장해 줄 것을 저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독해가 아니고서는 텍스트라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우치다 다쓰루는 스스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독해보다는 텍스트를 욕망하고 그 사상을 욕망하는 태도야말로, 그것이 비록 고전적인 읽기 방법일지는 몰라도 사유의 깊이를 통해 무한한 의미를 길어내는 독해, 언제까지고 제자로 남아있는 독해에서 벗어난 ‘스승이 되는 독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책에서 무엇보다 ‘명쾌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앞에서 선 철학자
감히, 윤리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절망 앞에서 선 한 철학자의 외침.
이 책이 그렇다고 단순한 ‘독해 방법’에 대한 책은 결코 아니다. 독해 방법이란 또 다른 타자인 레비나스를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의 일환이다. 즉, 레비나스 독해에 선행해야 하는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마음가짐에 이어 본래 책이 목적하는 바에 따라 충실하게 레비나스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레비나스 자신이 타자 문제를 통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진혼하는 일에 있었다. 본문의 일절을 살펴보자.
“‘홀로코스트’는 유럽 형이상학을 함양한 바로 그 풍토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홀로 코스트’ 이후 시대에 다시 그 동일한 형이상학을 토대로 비판을 하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절도를 잃어버린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해 경의를 잃어버린 행위입니다.
투명하고 예지적인 ‘주체’,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는 차갑고 중립적이며 관상적인 ‘앎’, 그러한 것을 유럽 문명 ‘재건’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더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를 위시한 유럽의 철학자들은 과거 이성과 합리의 절정이라고 여겼던 유럽의 형이상학과 그 형이상학이 낳은 홀로코스트라는 참상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철학자’라면 그 누구도 그 참상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누군가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책임으로 귀책될 수밖에 없고, 그 원인의 귀책은 필연적으로 책임 회피라는 함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의 책임을 말하는 순간 자신의 무책을 주장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유럽의 형이상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동시에 무엇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출구없음의 상황’ 자체 또한 모든 유럽의 철학자들에게는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가 레비나스에게 요청한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진혼이었다. 레비나스는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 안기로 한다. 레비나스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혹자가 보기에는 자신의 무책을 주장하며 히틀러와 하이데거를 발생시킨 주류 철학계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할 수도 있었으나,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로서 하필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자신의 유책과 더불어 ‘죽은 자’들이 온전히 ‘죽을 수 있도록’ 그들을 산 자들의 법정에 세우기를 중단한다. 급기야 레비나스는 자신이 받은 박해에 대해조차, 더나아가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수난에 대해서조차도 자신의 책임을 주장한다.
“과실을 범하지 않음에도 죄의식을 갖는 것, 마치 나는 타자를 알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시점에 타자와 관계를 맺어버린 것처럼, 이 죄상 없는 유책성이 중요합니다. 타자는 나에게 늘 무엇인가였고 타자의 ‘이방인’이라는 조건이야말로 나와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타자는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윤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레비나스의 이와 같은 사유의 전개가 단지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 떠 안기로한 철학자의 결단으로 그리는 다수의 해설서와는 달리, 우치다 다쓰루는 이 모든 것이 레비나스 자신의 고통이기도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즉, 어떠한 상황을 만난 레비나스가 어떠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는 식의 단순한 인과로 그리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 놓인 상황 앞에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던 절망 앞에서의 한 철학자의 긴급한 책임으로서의 타자론을 그린다는 데에서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그 어떤 해설보다 레비나스의 생생한 시선을 그리고 있다.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