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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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은 흔히 현재의 필요에 의해 상징으로 소환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고종만큼 상징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곧 현재를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고종의 통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물음이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의 향배를 어디로 정하는가와 결부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는 구한말 조선과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절박함에서 집필되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민족주의적인 희망으로 고종을 항일·자주·근대화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온 것에 맞서서, 실제 역사를 낱낱이 밝힌 뒤 현재 대한민국의 오류를 짚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고종, 시대를 읽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한 지도자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는 어떤 이들에겐 퍽 충격적인 책일 수 있다. 저자 김용삼은 방대한 사료를 참고하여 자국 역사에 관한 한국인의 통념을 혁파해나간다. 고종이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던 찰나 외세의 침략을 당해 개혁이 좌초되었다거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문명을 전파해주었다는 등의 ‘역사적 오류’를 짚어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주요 비판 지점이 되는 것은 바로 고종의 ‘반시대적 행보’다. 고종은 근대가 발아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대에 조선의 이른바 ‘존명의리’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군주였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줄은 모른 채 개화파를 탄압했으며, 의지할 만한 국가를 찾아 헤매다 결국 러시아와 밀약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영·미·일 해양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패착에 빠지게 된다.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저자 김용삼은 오랜 기자 생활로 다져진 현실감각과 역사 저술가로서의 안목으로 현재 우리의 위기를 진단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가장 노골적인 반미·반일 성향을 보이며, 그러한 이념적 지향성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결국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설립하는 반면 한·미·일 공조는 흩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에서는 조선 멸망 원인을 외세의 침략이나 냉전체제 따위에서만 찾아왔던 우리의 통념이 문제시된다. 조선의 망국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은 세계 주류 질서를 무시하고 ‘폐국’의 길을 택한 국가 지도부의 무능한 외교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언제나 아래로 향했고, 백성, 즉 국민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비극이 이어져 왔다.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우리의 근대사는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1. 300년 정지된 조선의 ‘역사 시계’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멸망 원인을 피상적인 데서 찾는다. 19세기 말 조선이 일본보다 30여 년 개항이 늦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조선의 멸망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1543년에 개항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조선은 백성에게 지식을 보급하지 않음으로써 폐쇄적인 사회로 굳어졌다. 이는 국가 지도부가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 고종 시대의 개막 당시 조선 사회의 폐쇄성의 책임은 물론 사회 지도층에게 있다. 1866년부터 조선을 드나들었던 독일인 오페르트는 그의 책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정부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체제” 때문에 영리한 백성이 능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1864년, 이처럼 위태로운 조선에 12세의 ‘소년 왕’ 고종이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여러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부작용은 기존 정치의 폐해와 맞먹었다. 결국 대원군은 고종을 앞세운 민 왕후와의 권력 다툼 끝에 권력을 잃었다. 3. 혼란의 시대 고종이 권력을 잡고 단행한 조치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뿐이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화폐 정책을 단행했다가 경제 혼란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없앴던 만동묘를 부활시켜 오래전에 망해 없어진 명나라의 황제들에 제사를 올렸다. 군사 정책 역시 외적을 막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국왕 근위부대의 덩치만 키우는 식이었다. 변방 수비제도가 나약해진 결과는 참담했다. 1875년 운요호가 조선 해안에 나타났을 때 이 배가 지나간 고을 중 그 어디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고, 조선군은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에서 일본군에 참담하게 패했다. 조선과 일본은 그 이듬해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4. 러시아라는 ‘곰’을 경계하라 세계의 흐름과 괴리된 조선의 실상은, 일본을 방문한 조선수신사의 모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계인의 눈에 수신사는 그 모습부터 시대착오적인 “화석과 같은 무리”일 뿐이었다. 수신사는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기술의 견문을 넓히라“는 목적이 무색하게 배울 생각은 없이 서둘러 본국으로 귀환한다. 이른바 ‘소중화 국가’의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조선이니 자신들의 국제적 위치를 알 수도 없었다. 당시 세계는 러시아와 영국의 패권다툼으로 시끄러웠는데,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대열에 편입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수신사 일행은 이 같은 상황을 고종에게 보고할 줄 몰랐다.<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