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톤먼트'의 원작자 이언 매큐언의 최신작!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타임스' 선정 2007년 올해의 책
독자에게도 사랑받지만, 특히 작가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가 있다. 이언 매큐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존 업다이크, 필립 풀먼,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해외 작가들뿐만 아니라 김영하, 김애란, 김연수 같은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작가. 그의 작품은 평단으로부터 일관된 지지를 받는 동시에, 발표하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된다. 필립 풀먼이 표현한 대로, 이제 영문학에서 그 정도 무게의 작가는 “손꼽아봐야 한두 명”이다.
또한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독자들은 대부분 그의 작품을 모두 탐독하는 전작주의자가 된다(그리하여 국내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작품들도 이제는 편집자들과 독자들의 의지로 다시 재출간되고 있다). 2007년에 발표되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동시에 부커상 후보가 되었던 그의 최신작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을 ‘시작하고자’ 하는 독자들이나 그의 후속작을 애타게 기다려온 독자 모두를 충족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작품이다.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젊은 신혼부부의 성과 사랑을 담담하면서도 밀도 깊게 그려낸 이 러브스토리는 매큐언 작품의 모든 특징을 가장 압축적이고 깊게 드러낸 백미다.
소설가들의 소설가, 작가 중의 작가
특이한 소재를 특이하게 쓰는 작가가 있고,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고 할 때, 초기의 이언 매큐언은 분명 전자에 해당하는 작가였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 『시멘트 가든』 『이런 사랑』 등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발표된 그의 소설은 근친상간, 폭력, 일탈과 소외 등의 다소 무겁고 부담스러운 소재를 단절적이고 난해한 서술 방식을 통해 드러냈고, 그런 까닭에 그의 별명은 한동안 ‘피투성이 이언(ian macabre)’이었다. 그런 그의 스타일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에게 부커 상을 안겨준 『암스테르담』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스타일은 ‘죄의식과 속죄’라는 문학이 다루어온 가장 무난한 주제를 가지고 승부한 『속죄』로 안착했다. 인물의 의식을 페이지 위에 바로 투사해낸 듯한 심리묘사의 그 믿을 수 없는 밀도, 시간과 공간의 결을 느끼게 하는 묘사력, 아무리 냉담한 독자라도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진심 어린 반전이 펼쳐졌다. 바로 전 작품인 『암스테르담』으로 이미 부커 상을 수상한 뒤라서 『속죄』는 후보에 그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분개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이미 『속죄』는 영문학의 고전이었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이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속죄』가 화려하고도 정교한 교향곡이었다면, 그의 최신작 『체실 비치에서』는 심플한 현악 소나타와도 같다. 『속죄』에서 보여준 그 놀라운 묘사와 호흡이 긴 장문의 문체는 최대한 단순해졌고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간단하다. 프리섹스와 록음악,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세계를 휩쓴 해방의 시대를 바로 목전에 둔 시절, 자유로워지길 갈망하지만 아직 보수적인 의식을 벗어던지지 못한 젊은 남녀가 첫날밤에 직면한 성과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너무나 흔하고 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심한 듯 흘러간 과거의 한 장면, 전형적인 듯 보이기도 하는 한 줄 한 줄의 덤덤한 서술은 이야기가 차근히 직조되어가며 작품 전체의 무늬가 드러나는 순간, 독자의 마음을 아찔하게 뒤흔든다. 의미를 구축하고 플롯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품위 있게 배치하는 작가의 손길은 장인의 그것이다. 그리고 그 고전적 터치가 주는 여운과 떨림은 길고도 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해변과 귓가에 맴도는 모차르트 현악오중주
단 한 번 사랑하고 평생을 그리워한 젊은 연인들의 슬픈 운명…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1962년 초여름, 런던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청년 에드워드 메이휴와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현악오중주단의 수석 연주자인 플로렌스 폰팅이 결혼식을 올린다. 이십대 초반의 사랑스러운 젊은 커플은 안개가 온통 해변을 휘감은 따뜻한 칠월의 어느 날, 체실 비치의 외딴 호텔로 신혼여행을 온다.
첫날밤을 앞둔 두 사람은 각자 고민에 시달린다. 에드워드는 첫 섹스에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한다. 극히 새신랑다운 순진한 고민이다. 플로렌스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무겁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섹스 자체를 혐오한다. 침대로 다가갈 시간은 다가오고, 젊은 커플은 각자의 욕망과 두려움이 시키는 대로 밀고 당기기를 시작한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고민과 두려움을 에드워드에게 감추기 위해 섹스에 대한 혐오를 애써 숨기려 하고, 에드워드는 그런 그녀의 고민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일을 서두른다. 결국,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그들은 실패한다. 신부는 혐오를 이기지 못해 첫날밤의 잠자리를 뛰쳐나가고, 신랑은 그런 그녀의 반응과, 뒤이어 그녀가 제안한 자기희생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그녀와 결별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시간은 흘러간다. 성의 자유가 도래하고, 개인주의가 팽창하는 사회를 살면서 에드워드는 이따금 그녀의 제안을 뒤늦게 떠올린다. 사랑 빼고 모두 가진 그의 삶은 무미건조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는 단 일 분도, 반 페이지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내내 그를 그리워했음을, 그들의 자그만 약속을 결코 잊지 못했음을. 그리고 생은 그렇게 마감된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본문 197쪽)
당신이 가지 않았던 길
그 끝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치 품격 있는 단막극의 내레이션처럼, 이야기 전반을 이끌어가는 작가의 목소리는 극히 담담하고 객관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약함과 그것으로 빚어진 슬픈 운명. 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은 이언 매큐언의 오랜 주제다. 이차 대전, 동서로 나뉜 베를린을 배경으로 스릴러 소설의 긴장감과 아스라한 노스탤지어를 동시에 펼친 『이노센트』(근간)나 영문학의 오랜 전통인 심리소설의 절정을 보여준 『속죄』에서 일관되게 탐구해온 이 모티프는 비로소 이 작품 『체실 비치에서』에서 장인적인 솜씨로 완결된다.
젊은 시절, 도전적인 주제와 실험적인 스타일로 주목을 끌었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이제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고전적인 주제를 통찰하는,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최상의 예술가는 결코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의무를 잊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매큐언은 다음 작품을 진심으로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