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공존을 위한 존재론적 사유!!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현대 기술철학의 고전!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이하 『기술적 대상들』)는 소셜네트워크와 스마트 기기의 확산으로 인간 각각이 거대한 네트워크에 항시적으로 접속해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 기술적 대상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은 기술 의존의 시대에, ‘기술의 존재가치’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던져 주고 있는 기술철학의 고전이다. 시몽동은 이 책에서 기술적 대상들을 단지 이용가치만을 갖는 ‘물질의 조립물’로 보는 관점, 반대로 기술적 진보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는 테크노크라시적 관점, 그리고 (영화나 SF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인간을 적대하는 위협적인 ‘자동로봇’으로 인식하는 관점을 모두 비판하면서 인간과 기술적 대상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기술적 대상들은 인간들의 노예나 적대자가 아니라, 마치 생물체처럼 생성·진화하는 고유의 존재 양식을 가지면서 인간들과 동등하게 협력하는 존재이며, 인간들 역시 기계들을 발명하고 조정하는 존재로서 기술적 대상들의 생성과 진화의 과정에 참여한다.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들』에서 보여 준 기술에 대한 탁월한 사유는 그 독창적인 발상과 개념들로 출간 이후, 많은 철학자와 기술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질 들뢰즈 외에도 파올로 비르노,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정치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러, 브뤼노 라투르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시몽동의 사유를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아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중요성에 비해 이 책을 타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더딘 편이다(『기술적 대상들』은 아직 영역본도 일역본도 출간되지 못했다). 시몽동의 사유가 철학뿐만 아니라 물리, 생물, 사회학, 심리학, 기술공학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어판은 베르그손, 시몽동, 들뢰즈로 이어지는 ‘표현적 유물론의 자연철학’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옮긴이 김재희가 오랜 기간의 세미나를 통해 이런 난점들을 극복하고 완성도 높은 번역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한국어판에는 시몽동이 1958년 초판 출간 당시 작성해 두었지만, 그동안 출간되지 못했던 ‘지은이의 말’을 부록에 수록했다. 이는 아직 프랑스어 원서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세계 최초로 전문이 공개되는 것이다. 시몽동의 육성으로 책의 전반적인 의도를 개괄할 수 있는 이 글은 시몽동의 철학으로 들어가는 좋은 입구가 될 것이다.
기술적 대상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양상들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를 한편으로는 개체의 수준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앙상블의 수준에서 고찰한다. 우선 개체적 수준에서 기술적 대상에 대한 인간 개체의 접근 방식을 크게 소수적 양식과 다수적 양식으로 구분하는데, 소수적 양식이란 기술적 대상들이 연장이나 도구의 수준에 머무를 때 가능한 것으로, 이때 기술적 대상과 인간 사이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어린아이 시절에 이루어진다. ‘수습공의 인식’에 비유되는 이 소수적 양식에서 기술적 대상은 일상적 삶에 필요한 사용 대상으로 취급되어 인간 개체를 성장시키고 형성하는 환경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거의 본능적인 능력과 직관을 가지고 기술적 대상을 다루는 이런 관계 맺음은 공동체의 엄격한 기술교육과 통과의례에 의해 전수되는 경향을 가진다. 이에 반해 기술적 대상에 대한 다수적 양식은 과학들로 정교해진 합리적 인식의 수단들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어른의 반성적인 의식화에 상응한다. 기술적 대상이 소수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수습공의 인식’에 대비해서 ‘엔지니어의 인식’에 비유되는 이 다수적 양식은 구술과 통과의례만으로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소수적 양식의 기술교육과 다르게 보편적이고 종합기술적인 기술교육을 지향하는데, 소수적 양식에서 다수적 양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서 잘 드러난다.
앙상블의 수준에서는 기술적 진보에 대한 인간들의 가치 부여 양식에 따라 기술적 대상과 인간과의 관계가 달라진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요소들의 개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8세기에는 낙관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연장의 운반자인 인간 개체를 기계가 대체한 것으로 보이던 19세기에는 진보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과 이로 인한 좌절과 불안감이 기술적 대상과 인간 간의 관계의 지배적인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비관적 인식이나, 기계를 통해 무제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다는 테크노크라시적 믿음, 혹은 인간의 간섭이 필요 없는 완벽한 자동기계(로봇)가 가능할 것이라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진보 개념을 창안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기계와 경쟁하고 기계로 대체되는 연장들의 운반자가 아니라, 기술적 개체를 조직하는 발명가이며, 앙상블 속에서 기계들 사이의 양립 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명체로서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보를 수용하는 열린 기계(완벽한 자동기계, 즉 완벽하게 닫힌 기계란 존재할 수 없다)의 비결정성의 여지에 개입하여 하나의 기계로부터 다른 기계로 정보를 번역·전달해 주는 매개이자 조정자로서의 역할(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접속), 바로 네트워크적 관계야말로 인간과 기술적 대상과의 적합한 관계 맺음이다.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독특한 입구
『기술적 대상들』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부는 각각 분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1부가 기술적 대상들의 발생과 진화의 과정을, 2부가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관계 맺음을 고찰하고 있다면, 3부에서는 ‘기술성’ 자체의 본성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기술성 자체의 발생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고 있다. 앞의 두 개 부의 기술철학적 논의와 달리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펼쳐지는 3부에서 시몽동은 ‘기술’을 인간과 세계가 관계 맺는 여러 양상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시몽동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양상을 마술, 종교, 미학, 과학, 윤리, 철학 등으로 분석하면서, 이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기술성’의 발생적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요충지들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던 원초적인 ‘마술적 세계’로부터 요충지2
들을 분리해 낼 수 있는 ‘기술성’이 등장하고, 그와 동시에 ‘바탕’에 대한 인식인 ‘종교적 사유’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술적 세계로부터 양분(兩分)된 기술과 종교는 다시 과학과 윤리의 발생을 조건 짓는다. 또한 이 각각의 사이에 분리를 통합하려는 양상이 존재하는데, 기술과 종교 사이의 대립을 중화하고 양자를 소통시키기 위한 미학, 그리고3
이 모든 분화와 변이의 발생적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직관하면서 기술과 종교 이후의 대립들(과학과 윤리, 이론과 실천)을 새롭게 통합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는 철학이 그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세계가 맺는 관계 전체를 통찰하는 『기술적 대상들』 3부의 시도는 물리적 실재로부터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기계적 실재까지, 세계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몽동의 백과사전적 시도의 일단을 보여 준다. 박사학위 주논문(『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황수영 옮김, 2012년 그린비 출간 예정)에서 시작되어 박사학위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에서 완성되는 시몽동 사유의 전체 체계는 ‘개체화’라는 개념을 중심축으로 하여 성립된다. 이미 존재하는 ‘존재’를 통해서 그 존재의 근원이나 원리를 묻는 기존의 철학들(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비판하면서,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 ‘개체’, 곧 ‘존재’를 설명해 내는 시몽동 특유의 ‘개체화론’은 질 들뢰즈를 위시한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만큼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술적 대상들』에서 보여 주고 있는 ‘기술성’에 대한 사유들은 시몽동의 전체 사유 중에서도 독특한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