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엥겔스, 그는 진정한 이론적 실천가이자 실천적 이론가였다 청년 엥겔스가 살아간 시간은 산업혁명의 절정기였다. 청년 엥겔스가 살아간 공간은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속의 행위자였던 그는 시대 속으로 들어간다 - 실천가 엥겔스. 산업혁명의 중심지 맨체스터와 영국 북부를 샅샅이 탐색한 엥겔스는 하나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에는 시대가 만들어낸 노동계급이, 그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경쟁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참혹한 귀결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여기서 끝맺었다면 엥겔스는 그저 실천가에 그쳤을 것이다. 청년 엥겔스는 여기에 철학적 전망을 더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현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모든 이들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미래를 전망한다 - 이론가 엥겔스. 우리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청년 엥겔스의 사회적 보고, 철학적 전망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디킨스의 소설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설득력은 뜻밖의 선물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서,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19세기 이래, 세계의 시대정신은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서구의 근대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계몽주의의 합리성은 기계 중심의 세계, 이윤 창출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러한 세계관이 집약되어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실현된 시간과 공간이 바로 19세기 중반의 영국이다. ‘19세기 중반의 영국’은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재’는 노동자가, 대도시가, 경쟁이 장악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에는 ‘인간’이 없다. ‘19세기 중반의 영국’에 관한 청년 엥겔스의 이 보고서가 ‘우리의 현재’에 대한 보고서이며, 동시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지침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의 한국어판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제목으로 1988년에 출간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없고, 출간된 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났으므로 새로운 번역본에 대한 요구가 절실했다. 이 번역본이 대본으로 삼은 것은, 1845년에 독일어 초판이 나온 지 42년이 지난 1887년에 F. 켈리 비슈네베츠키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엥겔스가 직접 개정한 후 뉴욕에서 첫 출간한 판본이다. 이 밖에도 독일어판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참조하였으며, 독일어판에만 있는 주석과 도판을 첨부했다. 독일어판이 아닌 영어판을 선택한 이유는 이 영역본이 엥겔스가 생전에 직접 교정하고 인정한 판본일 뿐 아니라 출간 당시를 기준으로 엥겔스가 서문과 각주 등을 첨부했으며, 무엇보다 이 책의 배경이 영국이고 엥겔스가 참고하고 인용한 자료들 역시 대부분 영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고전인 만큼 인용의 준거로 삼을 수 있도록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되 청년 엥겔스의 문체를 살리도록 노력했다. 엥겔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청년 엥겔스는 산업혁명 시대의 공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대도시’를 걸어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대듯 그들의 삶을 묘사한다. “올드필드 가와 크로스 가 사이에 있는, 가장 열악한 안마당과 골목으로 가득한 구역의 노동자 거처들은 불결과 과밀이라는 면에서 구시가지의 거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 구역에서 나는 60세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외양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창문도 없고 마루도 천장도 없는 장방형 우리에 일종의 굴뚝을 만들어놓고는 썩은 지붕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침대틀을 하나 구해 거기서 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너무 늙고 약해서 일정하게 일하지 못했고, 손수레로 분뇨를 치워서 생계를 꾸렸다. 그의 ‘대궐’ 옆에는 똥떠미들이 쌓여 있었다!” 청년 엥겔스는 1840년의 런던에 만연해 있던 ‘소외’에 대해 말한다. “이 개인들이 제한된 공간 안에 모이면 모일수록 각자의 야만적인 무관심, 사악만을 추구하는 매몰찬 고립 상태는 한층 더 혐오스럽고 불쾌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이런 개인의 고립, 이런 편협한 이기주의가 어디서나 우리 사회의 근본 원칙이라는 것을 누군가 제아무리 명확하게 인식하더라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이 대도시만큼 뻔뻔스럽고 몰염치하고 자기 위주인 곳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인류가 각자의 원칙과 목적을 가진 단자들로 분해되는 원자들의 세계는 이곳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청년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한다. “과거의 노예제와 현대의 노예제의 유일한 차이는 오늘날의 노동자가 자유로워 보인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한 번에 팔리지 않고 일, 주, 연 단위로 조금씩 팔리고, 어떤 주인도 그를 다른 주인에게 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특정한 사람의 노예가 되는 대신 자산계급 전체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팔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으로 보면 노동자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으며, 설령 이런 겉치레 자유가 불가피하게 그에게 진짜 자유를 약간 주더라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아무도 그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불이익을 수반한다. 노동자는 주인인 부르주아지에게 언제라도 버림받을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이며, 부르주아지가 그의 일자리와 생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면 굶어죽고 만다. 반면에 부르주아지에게는 과거의 노예제보다 현행의 방식이 훨씬 낫다. 투자한 자본을 손해보지 않고도 피고용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고, 부르주아지를 위로하는 듯한 아담 스미스의 지적처럼 노예제에서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값싸게 노동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엥겔스는 자신이 관찰한 이러한 비참함과 계급 억압의 파노라마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물론 엥겔스의 이러한 결론은 맞지 않았다. 엥겔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영악해져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깨부수고 자본주의 사회를 한층 더 확고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기본 관계는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2014년 11월에 발표된 영국 내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 매춘을 하는 여성들과 소녀들, 그리고 공장이나 농장, 어선 등에서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하고 일하는 이들이 영국에서만 1만 3000명에 이른다. 청년 엥겔스의 서술을 21세기 한국에 투영해보면 우리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