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생 외할아버지와 90년대생 역사학도 손자
손에 잡히는 ‘무명의 역사’를 엮어내다
‘구술사+사료비판’으로 역사의 틈새 메우기
반갑다. 진작 이런 현대사 책이 나왔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동원체제,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한국전쟁과 ‘인공치하’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짚어내는 책도 가치 있지만, 그 틈새에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피부에 와닿는’ 역사도 놓치기 아깝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공하는 지은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축으로, 묵은 사료에서 뒤져낸 ‘역사’를 더해 흥미롭고 생생한 ‘구술사 이상의 역사’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개명改名은 선택사항이었다는 등 ‘창씨개명’의 본질을 보여주거나(45쪽), 해방 직후의 중학교 입시제도 변화(112쪽), ‘인공치하’ 전후 좌우익의 학살로 얼룩진 아비규환(165~167쪽), 하루 평균 수십 명씩 탈영했던 ‘쌍팔년도’ 군 생활(194쪽) 등이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된다.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도 그득하다. 가마니가 일본의 ‘가마스’에서 전래되었다든가(64쪽), ‘몸뻬’가 조선 여성의 전시 복장으로 통일된 사연(94쪽), 영화관에 ‘지정좌석제’가 도입된 배경 등 역사 교과서에서 만날 수 없는 사실들이 그런 예다.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흥미롭고 귀한 역사책의 집필 의도와 서술방식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는 아래 저자와의 대화에서 담겨 있다.
- 왜 외할아버지의 삶에 주목했는지?
“일제시기-해방공간-한국전쟁-전후 시기에 걸쳐, 독립운동가 혹은 구국 영웅처럼 거대한 사명을 지닌 사람들 말고, 말 그대로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구술자 허홍무에게 특별한 사명감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가치관과 정치적 지향이 없던 건 아니었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력의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늘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의 시각을 따라 그 삶을 조명함으로써, 독립운동 혹은 주요 정치가 또는 구국영웅으로 대변되는 시대상에 無名인 사람들의 삶 풍경을 추가해 보고 싶었습니다.”
- 무명인의 구술을 ‘역사화’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개인의 구술이 지닌 한계를 어디까지 극복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의 구술, 특히 무명인의 구술은 신빙성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마을지, 총독부 관보 등 문헌부터 시작해 학교 생활기록부, 군대 거주표까지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려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구술에 대한 일종의 ‘사료비판’을 가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명인의 구술도 역사적 인물들만큼이나 자신에게 유리한 구술을 하기 때문에 꼭 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마음만 먹는다면 근현대사 영역에서는 무명인의 구술이라도 어느 정도 검증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개인의 구술에 대한 ‘완벽한 극복’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특히 무명인의 구술을 두고 이 정도로 접근한 것은 분명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 집필하면서 특히 유의한 점은?
“기존의 구술생애사 서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구술생애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구술자의 구술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만약 여기에 추가 설명이 덧붙는다면 구술자가 해당 사건을 겪으며 느끼는 것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 책은 역사학적 성격은 다소 부족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존 서술 방식을 넘어서서, 역사학의 성격을 대거 부여한 서술에 도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① 맥락 찾기, ② 검증하기, ③ 특정하기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도입해 구술의 증명과 사실관계 분석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구술생애사의 서술 범위가 더욱 확대되리라 생각합니다.”
-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의의는?
“자기 가족의 이야기 혹은 뿌리가 궁금하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분께 하나의 참고할 만한 교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구술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어떤 자료를 참고해야 할지 대략적인 감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마지막에 그 방법에 대하여 살펴볼 만한 내용을 서술해 두었습니다. 더불어 가족의 구술을 듣다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이는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공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구술사라는 분야의 독특한 성질이 아닐까 싶은데, 이것 또한 독자들도 함께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