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살아 있음이 어색한, ‘오후 네 시의 존재’들에게 보내는 신호
사람들은 내게 혼자 일하니 외롭겠다고 말하지만, 혼자 일하긴 해도 그 때문에 외로운 건 아니다. (…) 저자나 번역자, 편집자는 물론 디자이너까지 자신의 창의성이나 아이디어를 책에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지만 교정 교열자인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일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니까. 마치 그 옛날 빈방에 홀로 앉아 까맣게 잊혔던 그때처럼, 나는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 혼자라고 느끼기에 맞춤한 조건이 아닌가.
-「홀로, 나와 함께」 중에서, 64쪽
저자는 누군가의 원고를 서너 번 이상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교정 교열자로 일한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은 지독한 덤벙이임을 고백한다. 심장 수술 후유증으로 몸 한쪽이 자유롭지 않은 어머니 간병은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과다. 그는 왜인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면 혼자라고 느끼고, 마침내 혼자가 되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 든다. 책과 타인의 문장들은 그에게 자주 소외감을 안기지만, 이제 그것들은 여러 의미에서 떠날 수 없는 거처나 다름없다.
그는 오랫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았다고 회고한다.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이 없어야 하는’ 교정 교열 작업처럼 자신의 정체성도 그렇게 닮아온 걸까. 늦게 잠들고 늦게 깨는 일상 탓에 그에게는 ‘오후 네 시’ 즈음이 특별하다. 오후 네 시는 어떤 시간인가. 하루를 마감하기엔 이르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 살아 있으나 죽은 시간. 그래서 어색한 시간. 하지만 가만 보면 의외로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작가는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시간이 오후 네 시라고 말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후 네 시에 나는,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것이 궁금한 작가는 이 ‘특별한 유형지’ 같은 오후 네 시의 풍경들을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 세상의 이야기를 발신한다. 오후 네 시면 어색하게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오후 네 시의 존재’들을 향해.
돌아보면 내게 집은 늘 어두웠고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밝았다
돌아보면 내게 집은 늘 어두웠고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밝았다. 하여 나는 집에선 불행한 척해야 했고, 거리에선 행복한 척해야 했다. 나는 그게 내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집으로 가는 길」 중에서, 98쪽
김정선 작가는 ‘아침형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낮에는 어머니 간병을 하고, 늦은 오후부터 교정 교열 일을 시작한다. 간병 뒷정리와 이런저런 집안일을 겸하며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찾아온다. 적막을 쫓으려고 때 지난 오락 프로그램 재방송을 소리를 낮춰 틀어두기도 한다. 자세를 고쳐 앉고 교정지 위로 시선을 떨구다 문득 시계를 보면 어느새 새벽녘. 늦게 잠들고 늦게 눈을 뜬다. 다른 생활을 선택할 방도는 잘 없다.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자신뿐이라서.
그러다 2010년경에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시작했다. 남의 삶을 살다가 비로소 자기 삶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드는 무렵이 ‘오후 네 시’여서일까. 블로그 이름은 ‘오후 네 시의 풍경’이라고 지었다. 오후 네 시. 일반적으로는 근무 시간의 말미. 뭔가를 끝내기도 뭔가를 시작하기도 애매한 느낌이 지배하는 시간. 작가는 ‘오후 네 시’를 창구 삼아 5년 가까이 차곡차곡 글을 썼다. 집의 어둠과 거리의 밝음, 그리고 그사이의 어스름을 응시하는 자신에 대해서.
슬픔에 붙들린 자는 하염없이 나열한다
슬픔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열하는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드는 오열로 슬픔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랜 슬픔에 붙들려 있는 자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나열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나열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열한다. 그것은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중심을 뺏는 것이랄까. 분노나 희열에 사로잡힌 자가 중심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슬픔에 잠긴 자는 그 중심이 버겁기만 하다.
-「나열하는 자의 슬픔」 중에서, 176쪽
쓰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오열로 슬픔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랜 슬픔에 붙들려 있는 자’는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나열하기’다.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고 나열하기. 하지만 이로써 버겁기만 한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슬픔에 잠겼을 때, 슬픔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행위로 작가가 글쓰기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26년째 교정 교열자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덤벙이
워낙 멍한 채로 지내기 일쑤여서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게 장기 아닌 장기던 시절이었다. 실내화 주머니에 실내화는 물론 우산이며 필통, 장갑 등등 그 당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모으면 문구점 하나는 거뜬히 차렸을 것이다. (…) 물론 지금도 그러는 건 아니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글쎄, 그보다는 남이 쓴 글을 한 자 한 자 확인해야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지 싶다. 그사이에 다시 확인해보고 따져보고 점검해보고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를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일이 습관이 된 탓이리라.
-「신발 한 짝」 중에서, 168~169쪽
누군가 쓴 원고를 한 자 한 자 꼼꼼히, 못해도 서너 번 이상 거푸 들여다봐야 하는 교정 교열 일. 그 일을 26년째 하고 있으며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등의 책을 내며 ‘교정의 숙수’ ‘문장 수리공’ 등의 이름까지 얻은 저자는 의외로 자신이 지독한 덤벙이라고 고백한다. 어릴 적 학교에 갔다가 어딘가 신발 한 짝을 벗어두고 맨발로 집에 돌아왔을 정도로. 밖에 나가면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돌아오기 일쑤이던 아이. 그는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를 속으로 연발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한다.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뿐만 아니라 같이 신발 한 짝을 벗어버리고 나란히 터덜터덜 걸어보겠다고 한다.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가슴 졸이는 삶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 때문에.
타인의 문장들 속 세상이 외롭고, 좋았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읽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나는 이런 문장과 만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것이 글인 줄 알았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거꾸로다. 모든 글은 신기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신기한 것이다.
-「소설 이야기, 둘」 중에서, 194~195쪽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라고. 언뜻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행위가 다름 아니라 글쓰기다. ‘책’은 그 신기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독자이자 교정 교열자로서 김정선 작가는 많은 시간을 그 현장에 머문다. 그리고 스스로도 글을 쓴다. 외롭고, 어색하고, 좋은 순간들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