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보편과 동질화의 폭력에 저항하는 차갑고 뜨거운 불꽃의 언어 동성애자, 친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딸, 포로가 되어 적군의 아이를 낳은 여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된 여수(女囚) 등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소수자들. 시인은 그들이 차마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추하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경림 시인 관계의 해지, 맨얼굴의 돌발적 출현이다. 최초의 관련을 향해서 거침없이 질주한다. 교란과 착란을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현실과 존재의 구체를 “조금 울고 조금 웃”으며 돌올하게 텍스트의 문면에 새겨 넣는다. 그 무늬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최초의 낯선 풍경이고, 보편과 동질화의 폭력에 저항하는 차갑고 뜨거운 불꽃의 언어이다. ―홍일표 시인 2002년 《시와 반시》로 등단한 김박은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중독』이 문예중앙에서 출간됐다. 첫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2009)에서 차가운 극사실의 세계와 뜨거운 환상의 언어로 사려 깊은 삶의 성찰을 보여줬던 김박은경 시인은, 이번 시집 『중독』에서는 세계를 경계 짓는 언어를 끝없이 의심하며, 보편과 동질화의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 시인 특유의 감각이 돋보인다. 시인은 사회적, 성적 약자로서의 소수자들이 놓인 부조리한 이 세계의 허위를 고발하고, 명징함이 가리고 있는 세계의 빈자리를 살피며 낱낱의 시선으로 꾸준히, 반복적으로 제 삶을 성찰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꿈틀거리는 빨강들 전쟁 중인 수용소 하늘에서 립스틱이 비처럼 쏟아졌다니 다 죽어가던 여인들이 살아났다니 밥도 아니고 옷도 아닌 그것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컴컴한 바닥 오물을 딛고 담요만 걸친 채로도 빨강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니 ―「빨강의 이름으로」 부분 “전쟁 중인 수용소” 혹은 “모두가 견뎌야 하는 지옥”(「빨강은 빨강을 안고」)에서도 살아 꿈틀거리는 건 “빨강들”이다. 김박은경 시의 화자는 대부분 여성의 목소리이며 그 빛깔은 빨강이다. 입술과 심장의 빨강처럼 그것은 생명을 간직한 빛깔이다. 시인은 생명이 없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빨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수용소 하늘에서/립스틱이 비처럼 쏟아”지니 “다 죽어가던 여인들이 살아”나고, 컴컴한 바닥에 오물을 딛고 뭔가가 꿈틀거린다. “열어젖히고” “터뜨리고” “피어나고” “태어나는” 생생한 것들, 혹은 빨강들이 드러난다. 전쟁 중 수용소에서 계속되는 것은 죽음뿐이 아님이 그의 시선에 포착된다. 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그 사태와 이분법을 무화시켜는 시인의 의도가 숨어 있다. 죽은 것으로 만든 음식/죽은 음식으로 영그는 살/죽은 살로 자라는 나무/죽은 나무로 만든 악기/죽은 악기로 부르는 노래/(…)/죽은 삶으로 환해지는 진실/죽은 진실로 자라는 집/죽은 집으로 부푸는 도시/죽은 도시로 상해가는 나라/죽은 나라로 꼬여드는 전쟁/죽은 전쟁으로 번지는 병/죽은 병으로 죽은 죽음 ―「죽은 죽음」 부분 “죽은 것으로 만든 음식”으로 시작해서 “죽은 병으로 죽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 위의 시는 결국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죽은” 어떤 것이라는 시인의 성찰이 담겨 있다. 죽은 생물을 먹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모든 삶은 다른 것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즉 살아 있다는 것은 끝없이 죽음을 의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시인의 각성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관계를 해지시키고 그 최초의 관련을 향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김박은경의 시다. “무덤 위에서 해봤어?”로 시작하는 작품 「4월 1일」에서도 삶과 죽음이 뒤섞인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무덤 위에서 성적 행위를 하는 몸들은 몸 아래의 무덤을 의식하지 않고 격양된 삶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화자는 “한 번의 이 옷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지막 “만우(萬愚)”라는 시어는 삶과 죽음에 경계를 짓는 일의 어리석음을 시인은 환기시키고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완벽한 결함’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홀려 떨림은 진짜일까 멎은 이 심장은, 그 눈 보는 거니 고양이 같아 키스할 때 지금 여기 있니 사랑할 때 너 누구니 대체 통조림 뚜껑이 열리면서 식탁 위의 집 한 채가 무너지면서 퉁퉁 불은 발목이 떠오르면서 이국의 향료들이 풀려나면서 사연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데 ―「고양이 수프 깡통」 부분 위의 시에서 통조림은 어찌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통조림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 사랑이라는 “무균 포장된” 이름 안에서 반복되는 것들에 대한 의심이다.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온전한 것으로 밀봉해버리는 것. 어쩌면 사랑은 “의심스러운 국물”을 담은 밀봉된 깡통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박은경은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명확한 언어로써 단언하는 태도를 의심한다. 거듭 의심하고 서로를 풀어헤친다. 그리고 정체 없는 삶의 세부를 가장하는, 세계의 허위를 고발한다. 낙타를 사러가는 건 어때 그곳에는 낙타를 칭하는 단어가 천 가지도 넘는다는데 그 많은 것들 중 하나로 당신이 당신의 낙타를 부를 때 내가 그걸 알아듣는 건 어때 낙타를 함께 타고 돌아오는 건, 둥근 낙타의 명랑한 등은 어때 오 분 전의 당신과 오 분 후의 당신이 다르다는 건 어때 다르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익숙해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어때 익숙한 노래는, 익숙한 연애는, 익숙한 만취는 어때, 닳고 닳은 몸에 몸을 들여 집이라 부르는 건 어때 ―「연인들」 부분 ‘낙타’라는 말로써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느낌과 이미지들이 있기에 화자는 “낙타를 칭하는 단어가 천 가지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 “낙타”라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 “그걸 알아듣는” 순간 연인들이 탄생하고 사랑이 생겨난다. 또한 화자는 “오 분 전의 당신과 오 분 후의 당신이 다르다”고 말한다. 당신은 매 순간 하나의 당신으로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당신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 중 하나로” 변모하는 중이고, 그 무수한 다름을 거듭 익숙함으로 밝혀내는 것이 내가 당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러니 언제나 배반당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매 순간 달라지는 당신의 매혹을 감당하겠다는 마음가짐이고, 거듭되는 의심을 감수하겠다는 태도이다.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 완벽한 결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중독」)고 고백한다. 이처럼 시인은 명확한 경계들을 의심하는 시선으로 세계의 면면을 바라본다. 세계의 명징함이 가리고 있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하고 그것들에 눈먼 시가 김박은경의 시다. 김박은경의 시는 한 생의 사소하고도 불가피한 섭리를 낱낱의 시선으로, 오로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되돌리는 일에 열중함으로써 하나의 특별한 시적 성취를 이룬다. 그것은 무언가 거창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꾸준히 반복해서, 그러니까 성실하게 제 삶을 성찰하는 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말이다. 그 말은 아는 것은 안다고 믿는 것은 믿는다고 고백한 다음에 남는 잔존하는 말이다. ―김나영, 해설「모두 말한 다음에 남은, 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