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지식인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고,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
“지식인: 남성 명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인간 집단. 드레퓌스 사건과 더불어 파리에 등장했지만, 20세기 말에 사라진 사람들.” _ 베라나르 앙리 레비
“진리와 정의를 지키는 것이 지식인의 소명이다.” _ 쥘리앵 방다
지식인, 글이 필요하면 펜을 잡았고, 탄환이 필요하면 총도 잡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사람들이 부쩍 정치에 관심이 많아졌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너무 무능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논리로 정치를 발언하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지식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식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또 정치에 참여하면서 어떤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에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 지식인의 삶을 예로 들며 답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식인은 프랑스의 발명품이다. 드레퓌스 사건과 더불어 지식인이 탄생했고, 그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사회에 큰일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사건에 개입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사건에 발 벗고 뛰어들었고, 시대 역시 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며 해답을 찾았다. 지식인들은 글이 필요하면 펜을 잡았고, 탄환이 필요하면 총까지 잡았다. 사르트르가 그랬고, 푸코도 그랬으며, 부르디외도 참여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면서 수많은 논쟁이 오갔고, 그 논쟁들은 여러 이야기를 양산하며 세계 각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전작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포스트워>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루게릭병으로 2008년에 사망할 때까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이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을 ‘편협한 민족국가’로 규정하며 이스라엘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미국이 일으킨 전쟁도 강한 어조로 비판한 바 있다. 자신이 한 명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그가 바라보는 올바른 지식인상은 무엇이었을까? 지식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또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지식인을 주제로 연구를 했다. 첫째 지식인은 프랑스에서 중요한 존재였으며, 둘째 정치적 참여를 하게 되면 도덕적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때 가장 손쉽게 떠오르는 존재가 지식인이라는 것.”
삐딱하게 살았고, 시대와 불화한 세 명의 지식인
이 책의 주제는 세 명의 프랑스인이다. 정치인 레옹 블룸, 소설가 알베르 카뮈, 철학자 레몽 아롱. 좌파 정치인-이방인-우파 학자. 레옹 블룸이 2차 대전 이전에 정치계에서 활약을 했다면, 알베르 카뮈와 레몽 아롱은 ‘주로’ 2차 대전 이후에 담론계에서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마다 무책임이 횡행했던 시대에 살았지만, 모두가 저항했던 사람들이라고 토니 주트는 말한다. 서로 매우 다른 사람이지만 그들은 무엇인가 독특한 것을 공유한다. 그들 모두 살아생전 프랑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삐딱하게 살았고, 시대와 불화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편’을 반대했다. 도덕적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혐오·의심·멸시·증오를 받았다. 고독했고, 영향력이 줄었으며, 명성도 제한됐다. 레옹 블룸과 레몽 아롱은 삶이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편안해졌으며, 모든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얻었고, 심지어 그들을 과찬하는 집단까지 생겼다. 알베르 카뮈는 35세에 일찌감치 칭찬과 존경과 과찬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이후 악성 비방을 심하게 받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사후 30년이 지난 뒤에야 카뮈는 명성을 되찾았다.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이 오늘날 흥미로운 이유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들과 통례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그들을 유럽의 과거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인물이라고 적확하게 기술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변방으로 밀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약에 변방에 밀렸던 사람이라면, 그들은 영향력이 미약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역사가들의 관심도 그다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는 내내 꾸준히 오해를 받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끔 너무할 정도로 동시대 사람들보다 정확히 이해했던 만큼 오해를 샀다. 그들의 공동체의 평가와 자기이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해질 무렵에 겨우 찾아왔다. 우리 역시 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때 그들의 도움을 몇 가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좌파 정치인 레옹 블룸
프랑스 사회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레옹 블룸. 그는 26세 무렵에 세기말 프랑스의 문학 현장을 주름잡은 인물이자 상당히 걸출한 드레퓌스파 지식인이었고, 양차 대전 중간에 프랑스 사회당 당수를 계속 역임했고, 1936년과 1938년 두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의 수상이었으며, 그를 투옥하고 기소하고 추방했던 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적이었고, 전후에도 수상을 역임했고, 1950년 죽기 전까지 프랑스의 가장 존경받은 원로 정치가였다.
그러나 레옹 블룸은 사회주의운동의 목표를 종교적으로 동일시한 바람에 프랑스의 이해관계보다 정당의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함으로써 양차 대전 중간에 조국의 정치를 분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이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토니 주트는 말한다. 이런 점 때문에 블룸이 이룬 많은 성과들이 가려져 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간에 블룸은 1930년대 후반 국제 현실에 직면해 평화주의, 집단 군축, 유화 정책을 폐기하자고 용기 있게 주장했다. 저명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비시정부의 페탱을 반대했던 소규모 프랑스 사회주의 집단에 속했으며, 이후 투옥되었을 때 오랫동안 견지했던 사회주의적 신념의 본질적인 부분을 70세의 나이에 다시 성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그는 성찰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신념의 근거였던 도덕적 전제와 사회적 비판을 폐기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블룸은 독특하고 독특했다. 그가 헌법과 정부의 개혁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였고 1945년 이후 프랑스 좌파를 부흥하고 근대적 합리적 원칙에 따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블룸은 수많은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 실수를 실수로 생각하며 인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공개적으로 수정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블룸은 때로는 엄청난 개인적 위험을 감수했으며, 언제나 자기가 누릴 수도 있었던 인기와 대중적 성공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그 같은 정치적 책임의식은 동시대를 살았던 정치인과 정치가에게 없던 것이며, 그 때문에 다수의 정치인들은 매우 극렬하게 그를 혐오했고 원망했다. 그의 정적은 그를 믿지 못했으며, 그가 성취한 모든 업적을 시기했다. 남달리 무책임한 정치인과 정치가 횡행했던 시대에서 레옹 블룸은 정치적 책임을 거의 혼자서 짊어졌던 셈이다.
카뮈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카뮈는 알제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측면에서 파리의 좌익 지성계의 외부인이 되었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니지 않은 카뮈는 학벌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프랑스의 최정예 지식인을 규정하고 식별하는 증표가 없었다.
이류 지방대학을 졸업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파리에서는 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