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영화

허문영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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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편집장,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현재 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두번째 평론집이다. 2011년부터 2014년 여름까지 쓴 글들이다. 이 책의 1부 ‘영화의 윤리, 죽음의 시학’은 <문예중앙>에 ‘인문학 연재-시네마노트’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여섯 편의 글 모음이다. 2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는 <씨네21>에 발표한 10편의 영화비평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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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1부 영화의 윤리, 죽음의 시학 아덴만의 미혹(迷惑) · 영화, 폭력, 폭력 이미지에 대한 단상 1 위장된 쾌락, 오인된 분노 · 영화, 폭력, 폭력 이미지에 대한 단상 2 웃음과 놀이, 혹은 비예술에서 배우기 · [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시신 이미지를 넘어 · 영화와 죽음에 관한 단상 1 파국의 죽음, 혹은 1인칭 죽음의 미로 · 영화와 죽음에 관한 단상 2 죽음의 시학, 삶의 시학 · 영화와 죽음에 관한 단상 3 2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레미제라블·라이프 오브 파이] 이야기를 넘어 [링컨] 숭고하고 더러운 손 [홀리 모터스] 진실은 막간에 있다 [코스모폴리스] 미학적인 자본가 [그래비티] 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사이비] 얼굴 없는 가면들 [변호인] 살균과 표백 [노예 12년] 진실이 폭력 이미지를 만났을 때 [님포매니악] 비웃음에 관하여 [제외될 수 없는] 숭고한 무능력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두번째 평론집 『보이지 않는 영화』 『씨네21』 편집장,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현재 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두번째 평론집. 2011년부터 2014년 여름까지 쓴 글들이다. 이 책의 1부 ‘영화의 윤리, 죽음의 시학’은 『문예중앙』에 ‘인문학 연재-시네마노트’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여섯 편의 글 모음이다. 2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는 『씨네21』에 발표한 10편의 영화비평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세상을 보듯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보듯 세상을 본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양자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투명하며, 이 글들은 그 모호한 경계지대에서 양쪽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책머리에’에서) 영화가 폭력과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관하여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힌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된 한국 해군의 작전 ‘아덴만의 여명’은 어떻게 우리를 매혹시켰는가. 20세기 후반을 한국전쟁과 광주를 비롯해 수많은 죽음의 행렬로 보냈고 지금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영화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가령 ‘아덴만의 여명’이 국가가 기획한 대단히 성공적인 폭력의 스펙터클 혹은 또 하나의 액션영화로 소비되었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아덴만의 여명’을 승인한 윤리적 기준으로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게 가능한가. 허문영은 지금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도덕적 심문을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폭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폭력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영화에 매혹된다는 사실이다. ‘아덴만의 여명’은 우리의 세상 보기와 영화 보기, 특히 영화의 폭력성에 관련된 의미 있는 쟁점들을 예시한다. 그것이 영화 아닌 영화, ‘아덴만의 여명’을 문제 삼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문영의 가설은, 우리가 ‘이 영화의 매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폭력 이미지의 거부하기 힘든 미혹성(迷惑性)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거쳐 허문영은 프리츠 랑의 [빅 히트](1953)와 조셉 멘케비치의 [노 웨이 아웃](1950)에서 의미 있는 참조점을 찾는다. 특히 허문영은 멘케비치가 ‘보여주기’가 아니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구조를 환기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허문영은 여기서 ‘숭고한 소극성’, ‘생략이라는 위대한 결단’을 본다. “이 폭력 사태가 루터의 의료 행위와는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운명 지어졌음을 아는 것은 루터의 노쇠한 어머니다. 그녀는 흑백 전쟁(실은 빈민들끼리의 전쟁)에 나서는 루터의 동생을 붙잡으려는 그의 아내를 만류하며 ‘너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주부로서)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뜨개질을 계속한다(이 대사야말로 이 영화의 ‘출구 없음’의 해제에 해당하는 메타적 진술이며, 숭고한 소극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이접(離接)된 원인과 결과의 틈새를 봉합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상상된 폭력(루터의 응급처치)과 가시적 폭력(흑백 빈민들의 충돌)이라는 대리전을 내세워 자신을 감추는 진정으로 폭력적인 구조의 폭력. [노 웨이 아웃]은 이 최종적 폭력의 정체를 그 징후로서 비로소 드러낸다. 이것이 생략이라는 위대한 결단의 효과다. 오늘의 영화에서 폭력 이미지의 과잉이, 단순히 폭력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폭력 이미지의 제한 없는 전시가 고전기 거장들이 개척한 폭력 이미지의 다양하고 풍부한 가능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폭력 이미지를 물신화해 폭력의 포르노그래피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정반대로 폭력 이미지의 미혹성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영화들도 있다. 우리는 특정한 폭력 이미지를 그 자체만으로는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비록 출구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또 폭력의 카니발에 나서려는 청년을 말릴 수는 없더라도, [노 웨이 아웃]의 노모처럼 뜨개질을 계속하게 해줄 분별력일 것이다.”(41~42쪽) 폭력 이미지에 대한 근심과 숙고에 이어지는 테마로서 허문영이 집중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영화는 어떻게 죽음을 다루는가’, ‘영화는 어떻게 죽음과 대면하는가’ 하는 의제다. 논의는 영화의 시신 이미지는 정작 죽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영화에서 시신 이미지는 죽음을 위장한다. 시신 이미지에서는 피사체와 관람자의 시공간적 격리로 인해 실재의 시신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의 심연이 제거된다. 외설성은 보존되지만, 불안의 심연은 거세된 허구의 시신 이미지들은 기껏해야 고통과 불행의 흔적만 연상시킬 뿐이다. 영화의 시신 이미지들은 더 자극적인 형상으로 변하거나,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더 복잡하게 맥락화함으로써 쓰임새를 유지한다. 그럴수록 그 이미지들은 죽음과 더욱 멀어진다. 죽음을 도구화할 때뿐만 아니라, 죽음을 애도하는 경우에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태다. 허문영은 죽음을 제시하지 않고 죽음을 드러내는 길은 없는지 묻는다. 그는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을 ‘죽음의 도구화’, ‘죽음의 애도’, ‘파국의 죽음’으로 나누어 살핀 뒤(1부 영화와 죽음에 관한 단상 1, 2), 이것들과 구분되는 다른 길을 오즈 야스지로와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는다(1부 영화와 죽음에 관한 단상 3). 그것은 ‘죽음의 시학’이다. “이야기와 서사적 기능에 흡수되지 않는 고도로 인위적인 오즈의 양식들은 그 자체로 오즈의 서명이며, 디제시스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그러나 압도적인 유사성의 이미지들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에서 사건성이 아니라 시간성이 떠오르게 하는 건 이 유사성의 이미지들, 즉 오즈의 양식들 자체이다. 변화하는 사물이 아니라 그 곁에 말없이 놓인 변화하지 않는 사물에, 즉 시간의 지속 안에서 자기동일성을 묵묵히 유지하는 사물에 시간에 새겨지는 것. 이것이 시간과 영화 이미지의 역설적 관계다. (…) 요컨대 오즈 영화에서의 죽음은 드물게 등장하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오즈가 결정화한 시간성(가령 오즈 영화에서 어떤 서사도 그것을 초과할 수 없는 큰 형식으로서의 ‘계절’)에 내재해 있다. 죽음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도 오즈의 영화는 죽음과 대면하고 있다. 이것이 오즈가 시각화할 수 없는 죽음, 부재로서의 죽음을 환기하는 방식이다.”(155~156쪽) 홍상수의 경우,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예외적으로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다룬 이후 죽음의 직접적 표상은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촌방향]의 포획하는 카메라, [하하하]의 회고하는 음성을 통해, 홍상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부재하지만 작동하는 응시(죽음 쪽에서의 응시)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를 보거나 주재하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문영은 홍상수의 영화적 모험이 결국 이 응시와의 대면, 같은 의미에서 죽음과의 대면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허문영이 보기에 그 모험의 요체는 ‘형식’이다. “한 편의 영화라는 여행의 끝에, 때로는 여행 도중에, 홍상수의 인물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모든 활동을 압류하거나 초월하는 무언가에 직면한다. 그 무언가는 특정한 사물, 혹은 불길한 목소리, 혹은 사라진 대상으로 환유되기도 하지만 결국 형식의 효과이다. 우리의 시선, 지각, 활동이 포획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부재가 어떻게 환기될 수 있는가. 시선, 지각, 활동의 형식을 일그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일그러뜨림은 해체가 아니다. 해체는 종종 이 세계를 잊고 자기 지시적 모더니즘, 자족적 형식주의에 몰두한다. 홍상수는 일그려뜨려서 이 세계를 다시 본다.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뜨려서 다르게 다시 본다. 그 일그러뜨림들을 통해 매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종종 죽음의 응시라고 부를 만한 것이 환기된다. 홍상수는 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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