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
‘사건’이 있었다―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전범/침략 기업 연속 폭파
1974년 8월 30일, 자신들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부대라 칭한 이들이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폭파시켰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사망하고 165명이 다쳤지만,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7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책임이 있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제 침략/수탈을 자행하는 기업으로 지목한 미쓰이물산, 가지마건설 등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결국 1975년 5월 동아시아반일 무장전선 ‘늑대’ 부대의 다이도지 마사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체포되었고 주모자인 다이도지 마사시 등은 사형 판결을 받는다. 이는 일본의 격동기 반체제 저항운동사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일본 언론들은 기꺼이 이들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사건의 비극적 파장으로 인해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누구도 공공연히 거론하기를 꺼리는 사건으로 기피하게 되었다.
왜 미쓰비시인가, 왜 ‘말’이 아니라 폭탄인가
다이도지 마사시에 의하면, “미쓰비시는 전쟁 중에 조선 인민을 강제 연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학살했으며 … 지금도 한국에 경제 침략을 하고 있는 일본의 핵심 기업”이기 때문이다(2018년 한국의 대법원은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에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들이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비단 약탈 기업만이 아니라 일반 일본 시민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일본 사회가 덮어 버린 과거의 지층을 드러내는 데서 나아가 일본의 기업과 시민들의 풍요가 과거의 식민지 착취와 연루되어 있는 식민자의 후예이자 제국주의 본국인임을 망각하며 유지되고 있음을 고발하고자 했다. 일본인으로서 자국인 일본과 일본인을 향한 이러한 치열한 윤리적 질문은 그렇다면 왜 ‘말’의 공표나 설득이 아닌 폭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이른바 일본의 전공투 경험과 양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간단히 치부할 수 있을까. 일본의 비판적·실천적 지식인 오타 마사쿠니에 따르면, 다이도지 마사시 등의 역사·정치 인식은 그때까지의 일본 좌파의 주류적 인식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전후의 반전·평화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진보적, 좌익적 지식인들의 일국 평화주의의 한계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이도지 마사시의 경우,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일본인’인 이상 선주민인 아이누족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식민지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은 전쟁 전 만주철도 조사부에서 일했고, 미일 전쟁 개전 후에는 미얀마에 파견되어 자원 조사를 담당했다. 자신이 태어나기 3년 전까지 부친의 행적에서 보이는 아시아 침략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그 후 그의 궤적을 결정한 ‘원점’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좌파까지도 포함하는 이 두텁고 견고한 침묵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데 말(언어)는 무력하며 자신과 타자들의 존재까지를 건 투쟁이 긴요하다고 판단했다.
‘투쟁하는 자신의 절대화’와 ‘싸우지 않는 타자의 전면 부정’이 낳은 결과
그러나 행동의 결과는 참혹했다. 그들은 미쓰비시에서 일하는 사원을 포함하여 사람을 죽일 의도는 원래부터 없었기에 예고 전화를 걸어 사원을 피난시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사망자 8명, 중경상자 165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폭탄의 위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 통유리가 부착된 현대식 빌딩들에서 떨어진 유리 파편이 통행자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던 것, 예고 전화의 효과가 없었다는 것—참사가 벌어진 이유는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늑대’들은 당황하여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일단 개시한 전쟁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비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3주 후 그들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폭탄에 의해 폭사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라 착취에 기생하는 식민자들이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 버렸다. ‘투쟁하는 자신의 절대화’의 뒷면에 있는, ‘싸우지 않는 타자의 전면 부정’의 논리. 폭파 행위의 결과는 물론이고, 이러한 내용이 담긴 협박 같은 성명을 발표해 버린 것이 후에 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2. 사람
죽어간 자들의 잔상, 하이쿠
1975년 5월 19일, 미쓰비시중공업을 포함한 연속 기업 폭파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다이도지 마사시가 체포된 것은 그가 26세가 되던 해였다. 재판의 결과 사형이 확정된 것은 1987년이고, 그리고 마침내 2017년 5월 24일, 도쿄 고스게小管의 도쿄 구치소 병동에 있는 집중 치료실에서 다발성골수증으로 사망했으니 향년 68세. 따라서 생애에서 42년을 옥중에서 보낸 셈이다. 게다가 거의 해마다 사형이 집행되는 일본의 현실에서 언제 사형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형수에게는 누구보다도 엄격한 제한이 따르지만 사람과의 면회와 편지라는, 인간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정신적인 소통의 기쁨도 있다. 폐쇄적인 감옥의 건물 구조로 인해 사람과 자연스럽게 접하는 조건은 막혀 있지만, 차입되는 꽃가지와 함께 가끔씩 계절의 초목, 새의 노랫소리, 바람의 향기, 방 안으로 숨어들어 온 벌레나 나비 등에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끝없는 전쟁과 계속되는 자연재해를 신문으로 읽고 마음이 떨린다. 다이도지 마사시가 자신의 심경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하이쿠俳句(5, 7, 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였다. 감옥 속의 그에게 계절과 자연에 대한 서정을 담는 하이쿠 안에서 쉽사리 언어화되지 않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응축시키며 시간을 견뎌내려 했다. 그가 남긴 적지 않은 하이쿠들을 미루어 감옥 안에서도 그를 통해 노래하는 대상에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타 마사쿠니에 따르면, 다이도지 마사시가 읊은 하이쿠의 특징은 미쓰비시 ‘가해’의 기억을 반복해서 노래해 왔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오타 마사쿠니에게 생명이 다하기 반년 전 면회장에서 다이도지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사람을 죽인 인간과 죽이지 않은 인간이란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사형수로서의 그를 긴 시간 견디게 한 것은 죽은 자들의 잔영과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결코 덜어지지 않는 책임의식이었을 것이다.전쟁에서 죽은 이와 지진과 해일로 죽은 이를 생각할 때 그의 눈 속에는 미쓰비시에서 죽은 사람이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 죽은 자들의 음화陰畫 / 가을 해 질 녘”
세계와 홀로 마주서다―‘뉘우침’과 ‘사죄’는 자기부정인가
“옥중에서 끝없이 뉘우침과 사죄를 이어간 다이도지 마사시의 사념思念은 그만이 개척할 수 있었던 윤리의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피와 뼈』 등의 소설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재일교포 작가 양석일이 다이도지 마사시의 『최종 옥중 통신』에 대해 쓴 말이다. 결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결과를 직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사형수인 그가 감옥에서 42년간 수행한 일이며, 죽음을 기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의 윤리로 사형 폐지 운동을 이어간 이유였다.
『최종 옥중 통신』은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간 다이도지 마사시의 자기비판의 기록이자 거듭 갱신되는 사유로 세계를 읽어내기를 멈추지 않았던 동시대 비평의 기록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행동과 결과를 일본 현대 정치사에 박힌 유리조각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뽑아낼 수 없는 파편을 통해 일본 사회를 비추어 보려 했다. 그럼으로써 일본 사회의 내면을 읽는 소중한 자료를 남겨놓은 것이다. 오타 마사쿠니의 말처럼, 전쟁과 평화, 휴머니즘과 테러, 게릴라와 테러리스트, 범죄와 형벌, 사형과 사면, 격차와 빈곤—우리의 눈앞에 놓인 깊게 생각하고 맞서야 할 수많은 과제 앞에서 사회의 대세가 어떻든, ‘괴로움’이 있는 장소에서 이들 과제에 맞섰던 다이도지 마사시는 우리들이 미래의 열린사회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 서 있던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라 믿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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