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커다란 오마주.”
“만일 응축된 언어의 여왕이 있다면 그것은 유디트 헤르만일 것이다.”
시적인 문장과 단어들로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나는 나에 대해 쓴다. 나는 스스로의 삶을 따라서 쓰고, 다른 글쓰기는 모른다.”
‘21세기의 루이제 린저’ 유디트 헤르만
그녀가 매우 어둡고 힘든 소설을 끝낸 직후
낡은 집에 앉아 써내려간 17컷의 이야기들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가 마라카스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2010년 소설집 『알리스』가 출간된 후 12년 만에 새로운 번역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1998년 이십 대의 나이에 『여름 별장, 그 후』를 발표하며 “독일 문학이 고대했던 문학적 신동”이라는 전례 없는 찬사와 함께 화려하게 데뷔했다. 작가는 이전 작품들을 통해 사랑과 고독, 방황, 슬픔을 담백하고 투명한 문체로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내며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에 출간하는 『레티파크』는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긴 소설집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을 ‘매우 어둡고 힘든 소설을 끝낸 직후’ 자기에게 낯선 베를린 어느 구역의 낡은 집 내닫이창이 있는 방에서 써내려갔다. 창 너머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맞은편 집에 사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들이 실린 타인들의 일상’의 장면들을 스냅사진처럼 그러모은 뒤 이야기로 풀어놓았다.
『레티파크』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대개 중년 이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추억, 회상, 상실이 주된 주제여서 헤르만이 이전에 쓴 작품들에 등장했던 젊은 인물들이 나이를 먹어 과거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독자는 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며 그 사람의 일대기를, 그의 삶을 상상하고 추측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마치 「어떤 기억들」에서 모드가 그레타 할머니의 가족사진들을 보고 그녀의 인생을 추측하듯이. 그러나 그 추측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며, 모호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걸린 사진들을―그레타 남편, 자녀들, 개와 집의 사진들, 그레타의 긴 생애 전체를― 도힐끗 훑어본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레타를 찾아내기에는, 반백년 전 그레타의 표정을 찾아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_「어떤 기억들」 중에서
분량이 매우 짧은 데다 유디트 헤르만이 원체 구구절절 설명하는 작가가 아니어서, 독자는 『레티파크』를 읽으며 더욱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많은 여백으로 하여금 독자는 보다 자유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다. 또한 이 ‘알 수 없음’, ‘이해할 수 없음’,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 인생의 실상과 더욱 가깝기에, 허구로 쓰인 이야기들임에도 더욱 사실처럼 와닿는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나에 대해 쓴다. 나는 스스로의 삶을 따라서 쓰고, 다른 글쓰기는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쓰는 소설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듯한,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 절제의 미덕이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국에 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건 ‘사실이라는 바닥에 단단히 정박해 있는’, ‘스스로의 삶을 따라서 쓴’ 이야기여서다.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 진실을 어슴푸레 알 것 같지만 그것이 뭔지 말할 순 없는 기분. 때론 진실 때문에 멀어지는 아이러니. 사랑 때문에 마음이 부서지는 아픔. 작가가 풀어놓는 열일곱 편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 마주했던,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장면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 겪은 일, 느낀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록 정확한 문장과 단어로 된 이름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이름표를 붙이고 나면, 잘 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얽매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는 데보라가 물 한 컵을 아이의 두 손에 들려 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가 물을 마시는 동안 그녀가 그에게 던지는 시선에서 그는 자신들이 경계에 이르렀음을,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본다. 이 분기점에서 그는 놀랍게도 또다시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를 받을 것이다. 비록 그는 진실을 말했지만.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유에서.” _「뇌」 중에서
“그는 일단 오래도록 침묵한 뒤에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고.”
독자는 『레티파크』 속 이야기를 읽으며, 분명히 말할 수 없고, 또렷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인생의 진실에 더 가까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가는 여느 때처럼 대놓고 말하는 대신 넌지시 보여준다. 안개 속을 거닐 듯 뿌옇고 흐린 무수한 날들 속에, 잠깐 해가 나서 마침내 제대로 보고, 이해하게 되는 찰나의 순간. 깜짝 선물처럼 받아 들게 되는 보석 같은 순간. 그런 순간은 살아 있는 자만 만날 수 있다고. 그러니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가라고.
“내 꿈속에서 사람들은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이지 샤쿠스키는 이 문장을 로제에게 썼다.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파괴할 수 없는 것, 무언가 밝은 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돌연 로제는 그가 어디에 당도했건 간에 잘 지내기를 열렬히 소망한다. 다른 누군가의 꿈속에 나타나는 얼굴이었던 걸로 족할 수 있다. 그것은 정말로 축복 같은 일일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엘레나가 그 점에 관해 그래도 아직 아는 게 있기를, 레티파크가 아직 중요하기를 바란다. 그 겨울 사진들, 많은 걸 약속하는 그림자들, 불확실 속으로 가든 길들이.” _「레티파크」 중에서
인생은 본디 밝고 화창한 날보다 보통의, 아니, 보통보다 더 흐리고 어두운 날들이 많기에, 인생을 따라 쓴 그녀의 글도 조금 어둡고 음울하다. 그럼에도 이 어둠에서 도리어 편안함과 안온함이 느껴지는 건, 깜깜한 어둠이 아닌 은은한 불빛 하나 켜둔 어둠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 한때는 누군가의 꿈에 나타난 얼굴이었다는 사실, 미래의 장례식을 상상하면 울게 되는 얼굴이었다는 사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그걸로 족할 수 있고, 그것은 정말 축복 같은 일일 수 있다.” 과거에든, 지금에든, 미래에든,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은 얼마나 큰가.
가족, 부부, 친구 혹은 잘 모르는 사람들 간의 만남, 사랑, 권태와 상실에 관한 열일곱 편의 이야기들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 켠에 작고 은은한 불빛이 켜진다. 다른 누군가가 알아챌 만큼 큰 불빛은 아니어도 내 안을 밝히기엔 충분한 크기의 불빛이. 그 불빛이 우리 인생에 오래도록 묻혀 있던 어느 장면들을 떠오르게 해줄 것이다. 어떤 장면은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보고 싶어질지 모른다. 마치 아름다운 그림 앞에 서면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면, 비로소 보이리라. 그때는 모르고 지나갔던, 그래서 놓치고 잃어버렸던 삶의 의미들이.